20세기 이야기

1859년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출간

‘진화론’이라는 운명이 그를 향해 손짓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1831년

찰스 다윈(1809~1882)은 영국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에든버러 의과대에 진학했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케임브리지대로 옮겨 신학을 전공했다. ‘진화론’이라는 운명이 그를 향해 손짓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1831년이었다. 전 세계를 탐사할 예정인 영국 해군 측량선 ‘비글호’가 탐사에 동행할 박물학자를 모집한 것이 운명의 시작이었다.

1831년 12월 다윈을 태우고 장도에 오른 비글호는 남미와 호주, 아프리카 등지를 탐사했다. 다윈은 기항지마다 널려 있는 신기한 동식물 표본을 채집했다. 1835년 약 5주 동안 동태평양 적도 부근 갈라파고스 제도에 머물고 있을 때 다윈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거북과 핀치새였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찰스섬과 후드섬에 사는 거북의 등딱지는 목과 가까운 앞쪽 부분이 말안장처럼 위로 올라간 반면 제임스섬의 거북은 등딱지 가운데가 불룩 솟은 돔 형태를 하고 있었다. 또한 어떤 섬에 사는 핀치새의 부리는 단단한 견과를 깰 수 있도록 짧고 강했지만 다른 섬에 사는 핀치새 부리는 틈새에 끼어있는 먹이를 파먹을 수 있도록 길고 가늘었다. 각기 다른 서식 환경에 오랜 시간 적응해 오면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지만 그때만 해도 다윈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다윈이 이른바 ‘자연선택’을 통해 형질이 변화하고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은 비글호 항해를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와서였다.

비글호는 4년 9개월간의 항해를 마치고 1836년 10월 영국으로 돌아왔다. 다윈의 손에는 각지에서 채집한 동식물 표본들과 탐사 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18권의 노트가 들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끈 것은 핀치새 표본이었다. 다윈은 새의 부리 모양만 보고 핀치새, 굴뚝새, 검은지빠귀로 다르게 분류했다.

그런데 1837년 3월 조류학자 제임스 굴드가 다윈이 수집한 새를 모두 핀치새로 분류하면서 다윈은 같은 종의 핀치새가 서로 다른 종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조류학자는 핀치새가 단지 특정한 먹이를 먹기에 편리하도록 굴뚝새나 검은지빠귀 같은 부리를 갖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다가 ‘자연선택’이라는 결정적인 단서 얻어 

다윈은 1838년 10월 어느날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다가 ‘자연선택’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맬서스는 책에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반해 식량 공급은 한정되기 때문에 인위적인 조치가 따르지 않는다면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되며 자연적인 요소가 개입해 결국은 가장 허약한 인구집단을 절멸시킨다고 설명했다. 다윈은 자연에서 너무 많은 개체가 태어나면 경쟁 상태가 되고 경쟁에서 약한 개체는 도태되며 강하고 적응하는 개체만 살아남아 자손을 남길 것이라는 맬서스의 명제에 공감했다.

다윈은 1839년 ‘비글호 항해기’를 책으로 출간하고 1842년부터는 시골집에 틀어박혀 연구에 몰두했다. 1856년부터는 자연선택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하고 집필했다. 그런데 원고작업이 3분의 2쯤 진행되고 있던 1858년 6월, 말레이 제도에 머물고 있던 영국의 무명 박물학자 앨프리드 월리스가 다윈에게 자신이 쓴 논문 한 편을 보내왔다. 다윈은 깜짝 놀랐다. 런던학계에 전혀 연고가 없는 월리스의 논문에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진화론의 기본 골격이 간략하지만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월리스의 논문이 먼저 발표되면 수십 년에 걸친 다윈의 독창적 연구가 위협받게 되는 상황에서 다윈은 친구인 지질학자와 식물학자에게 편지를 보내 뒷수습을 당부한 뒤 자신은 병을 앓고 있는 자식에게 갔다. 친구들은 월리스가 다윈에게 논문 발표를 부탁하지도 않고 자신의 편지가 학회에 보고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데도 1858년 7월 1일 런던에서 린네학회가 열렸을 때 다윈의 논문과 월리스의 논문을 순차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논문은 학자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다윈으로서는 자신이 20여 년 동안 연구하고 있는 ‘자연선택설’을 단독으로 발표할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는 점에서 다행한 일이었지만 월리스로서는 섭섭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후 진화론에서 월리스의 이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인들에게 잊혀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월리스가 생전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항상 다윈을 먼저 내세운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월리스는 논문의 공동 발표도 문제삼지 않았다. 월리스는 생전에 다윈에게 전혀 유감이 없었고 공사석을 비롯해 한 번도 다윈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1889년 ‘다위니즘’이라는 책까지 내면서 다윈을 진화론의 유일한 아버지로 인정했다. 물론 다윈도 월리스를 끝까지 챙겨주었다.

 

‘종의 기원’은 진화론의 바이블

논문 발표 후 다윈은 책 발간을 서둘렀다. 그 결과 1859년 11월 22일 전문 14장으로 구성된 ‘종의 기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후 다시 한 번 인간의 세계관이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종의 기원’은 환호와 비난 속에 초판 1,250권이 금방 매진되었다. 이듬해 1월에 나온 3,000부도 곧 매진되었다. 6판인 최종판이 1872년 나올 때까지 모두 1만 부 정도가 팔렸는데 당시로서는 초베스트셀러였다. ‘종의 기원’은 점차 진화론의 바이블로 인정받았고 다윈은 국제적 인물로 부상했다

사실 진화론 자체는 다윈 이전에도 유럽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생물학적 진화학설의 창시자인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가 진화론과 관계된 ‘동물 철학’을 발간한 것이 1809년이기 때문이다. ‘동물 철학’에서 그는 단순한 생명체가 여러 세대를 거치게 되면 점점 더 복잡한 개체로 진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종이 변한다’는 사실을 처음 제기한 사람도 다윈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윈은 ‘종의 기원’ 3판 첫머리에 자신보다 먼저 종의 변화 가능성을 주장했던 34명의 학자들을 열거하는 것으로 자신이 최초가 아님을 밝혔다. 다윈의 친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과 라마르크도 명단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 역할은 하늘이 지정해 놓은 다윈의 몫이었다.

‘종의 기원’의 핵심은 생물 종이 불변이 아니라 자연선택에 따라 생기고 또 없어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연선택’이란 경쟁력이 없는 개체는 도태되고 경쟁력이 있는 개체는 더 많은 후손을 낳아 퍼뜨리는데, 그 선택의 방향은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자연선택은 자손의 모습, 색깔, 크기, 생화학적 특성 등 모든 것에 변화를 가져온다. 시간이 흘러 이질화된 집단 사이에 교배가 불가능하게 되면 서로 다른 종이 생겨난다. 하나의 종이 둘 이상으로 나뉘기도 하지만 A라는 종이 B라는 종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다위니즘의 또 다른 위대함은 마치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듯 생명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데 있다. 이 ‘생명의 나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은 지렁이나 난초와 마찬가지로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수백억 개의 가지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동일한 자연 질서의 일부라고 본 것이다.

 

다위니즘의 위대함은 생명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

다윈 이전에는 생물 종들이 신에 의해 설계되고 창조되었다는 설명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생물 종에는 고등한 인간부터 하등한 종까지 위계질서가 있다고 믿었다. 유일하게 영혼을 지닌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가 신의 뜻에 따라 형태와 지위를 부여받고 각각의 종들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물은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스스로 변화하고, 탄생하고, 멸종한다는 주장을 들고나왔으니 신이 삼라만상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던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위니즘은 이후 학자들의 끊임없는 담금질을 거쳐 자연과학은 물론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등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새로운 시각과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학문으로 자리 잡았고, 마르크스의 ‘자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더불어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상찬받았다.

문제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힘세고 포악한 종은 멸망하고 착하고 배려하는 종이 생존한다’고 했는데도 진화론이 강자의 횡포를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악용되었다는 점이다.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만든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사회 다위니즘’이 대표적인 악용 사례다. 스펜서가 약자들은 자연선택에 의해 도태되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편 후 그의 영향을 받은 인종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렸다.

다윈은 ‘종의 기원’ 초판 후 1860년 1월 2판을 낸 것을 비롯해 모두 5번의 개정판을 냈다. 1872년 마지막 6판에서는 그동안의 논란을 정리한 부록을 추가했다. 초판부터 5판까지의 책 제목은 ‘자연선택 혹은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종의 보존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해’라는 긴 이름이었으나 1872년 제6판이 발간될 때 제목이 ‘종의 기원’으로 바뀌었다. ‘진화’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도 6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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