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1897년 : 에밀 뒤르켐 ‘자살론’ 출간

현대사회의 병리 진단한 고전사회학자

에밀 뒤르켐(1858~1917)은 자살, 분업, 종교, 도덕, 교육을 망라하는 방대한 저작을 통해 현대사회의 병리를 진단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전사회학자다. 프랑스 로렌 지방 에피날의 유명한 유대계 랍비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79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하고 1882년부터 5년간 고교 철학교사로 근무하다 1887년 보르도대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되었다.

1896년 보르도대가 ‘사회과학’이란 명칭의 강좌를 개설하자 뒤르켐은 프랑스 최초로 사회학 강의를 시작했다. 같은 해 창간한 ‘사회학연보’(1896~1913)는 ‘뒤르켐 학파’를 형성하는 둥지 역할을 했다. 1902년에는 소르본대로 적을 옮기고 1913년 소르본대에 첫 사회학 강좌를 공식적으로 개설했다.

뒤르켐은 독일의 동갑내기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과 달리 사회학이라는 한 우물만 파 명성을 얻었다. 초기의 대표 저서 ‘사회 분업론’(1893)에서는 당시 학계나 사상계에 지배적인 진화 사상에 따라 사회의 연대조직과 통합 원리에 관한 일종의 발전단계설을 전개했다. 훗날 ‘뒤르켐 학파’의 성전이 될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1895)에서는 사회학적인 연구방법을 보완·발전시켜 일련의 체제로 정리했다.

뒤르켐의 대표 저서는 자살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자살론’(1897)이다. 뒤르켐은 방대한 자료와 통계를 기초로 한 예리한 분석과 실증적인 논증을 통해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는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통쾌하게 부쉈다. 그는 ‘자살론’에서 “우울증 등의 정신병, 집안의 유전적인 문제점, 세상을 살다가 겪는 극한의 조건 등 개인적인 상황이 자살을 일으키는 원인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면서 “자살은 엄연히 사회현상이며 자살의 원인 역시 사회적”이라고 주장했다.

뒤르켐은 자살이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통계자료를 내놓았다. 자살과 인종 관계, 알코올 소비량과 자살률의 비교, 키와 자살률의 관계, 종교별 자살률, 계절에 따른 온도의 영향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통계자료들은 신체적·심리적 성향과 물리적 환경 등 비사회적 원인이 자살률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뒤르켐이 각종 자살 관련 통계에서 발견한 사회적 요인으로 인한 자살의 원인은 ‘사회 응집력’ 혹은 ‘연대력’이라는 현상이었다. 이것은 자살률이 사회의 응집력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으로, 뒤르켐은 사회의 응집력이 강한 곳의 자살률이 약한 곳보다 더 낮다는 것을 밝혀냈다.

 

자살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통쾌하게 부숴

사회적 원인으로 인한 자살의 양상도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데 뒤르켐은 자살의 유형을 ‘이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로 구분했다. ‘이타적 자살’은 사회적 응집력이 매우 강한 곳에서 일어나는 자살 형태다. 이 자살은 집단의 힘이 개인을 완전히 압도하고 개인에게 집단이 삶의 전부이자 의미일 때 혹은 개인과 집단이 분리되지 않고 완전히 일치할 때 주로 목격되는 자살 현상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 또는 집단에 지나치게 밀착되었을 때 일어난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때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가 대표적인 ‘이타적 자살’ 형태다.

‘이기적 자살’은 한 사회나 집단의 응집력이 대단히 약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살이다. 사회나 집단의 응집력이 약화되면 집단주의보다는 과도한 개인주의가 판을 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주위의 다른 그룹과 끈끈한 연대감을 맺지 못한다. 따라서 ‘이기적 자살’은 사회 구성원 간의 유대감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이기적·개인주의적 성향이 전반적으로 팽배한 사회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아노미적 자살’은 당연하게 여겨지던 가치관이나 사회규범이 혼란 상태에 빠졌을 때 또는 사회 규제와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모호한 상태일 때 일어나는 자살 현상이다. 뒤르켐의 자살 연구는 본질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 상태에서 발생하는 자살에 ‘사회’라는 요인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당대 학계로부터 방법론적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뒤르켐과 지멜은 사회학을 연구하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많았다. 1858년 같은 해에 유대인으로 태어나고 사망연도 역시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보불전쟁(1870)은 물론 각종 노동문제와 더불어 사회주의 운동이 범람하던 혼란기를 살았다. 그런데도 둘 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냉담했다. 대조적인 측면도 많았는데, 사회학의 한 우물만 파 ‘사회학의 거두’로 성공한 뒤르켐과 달리 지멜은 사회학 외의 여러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뒤르켐이 생전에 업적을 인정받고 ‘뒤르켐 학파’를 중심으로 많은 제자를 양성한 것과 달리 지멜은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학자로서의 경력을 거의 인정받지 못했으며 제자도 없이 생을 마쳤다. 뒤르켐은 각종 제도를 항상 사회적 전체와 관련시켜 포착하고 새로운 통합학으로서의 사회학 건설을 기도한 반면 지멜은 통합적인 사회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에서 특수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을 건설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뒤르켐은 학문 연구에 보수적인 경향을 띠었지만 지멜에게서는 보수적인 경향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