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구법승들의 행적 밝히고 불교 문화재 파괴 현황 파악이 탐사 목적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타클라마칸 사막과 중앙아시아 티베트 지역을 탐험한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마크 아우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 독일의 폰 르코크, 러시아의 세르게이 올덴부르크 등을 들 수 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인 오타니 고즈이(1876~1948)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타니는 일본 교토의 유명 불교 사찰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21대 문주의 아들로 태어나 9세 때인 1885년 출가했다. 1898년 22세의 나이로 당시 권문세가의 딸와 결혼해 귀족이 되었는데 처제는 나중에 다이쇼 천황과 결혼, 데이메이 황후가 되었다. 처남은 오타니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오타니는 중국, 싱가포르, 인도를 거쳐 1900년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 런던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당시 유럽에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고고학적 탐험이 한창 불붙고 있었다. 종단의 기원을 중앙아시아에서 찾고 있던 오타니는 유럽 등지를 돌며 유럽의 탐험 동향에 눈과 귀를 열어 두었다. 영국에서는 스벤 헤딘, 폰 르코크 등 중앙아시아 탐험가들과 교분을 쌓으며 탐험을 준비했다.
첫 탐험은 1902년 8월 16일 영국 런던을 출발해 일본으로 귀국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탐사대의 목적은 인도에서 일본까지 이르는 불교동점(佛敎東漸)의 길을 답사하며 옛 구법승들의 행적을 밝히고, 이슬람의 불교 문화재 파괴 현황 등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오타니를 포함한 5명의 학승은 서투르키스탄 철도의 종점인 러시아의 안디잔(현 우즈베키스탄의 동부)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9월 21일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쪽 끝 오아시스 도시인 카슈가르에 당도했다.
이후 탐험대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오타니 등 3명은 인도로 내려가고 나머지 2명은 타림 분지 호탄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경유한 뒤 천산북로 일대를 조사하고 중국을 경유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오타니는 불교 전래의 중요한 경로 중에서 특히 현장 등 중국의 구법승이 인도로 갔던 족적에 관심이 많아 인도 각지의 불교 유적을 조사했는데 1903년 1월 갑자기 부친의 부음이 전해졌다. 오타니는 인도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국해 니시혼간지의 22대 문주가 되어 정토진종을 이끌었다. 1908년과 1910년에도 각각 2차·3차 탐험대를 중앙아시아로 파견했다.
이렇게 3차에 걸친 탐험 범위는 서역 지방을 중심으로 티베트, 네팔, 인도, 그리고 중국의 운남성과 사천성을 포함한 중국 각 지역 및 동남아시아에 이르렀다. 탐험 때마다 다량의 중앙아시아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왔다.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이다.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 최대 ‘오타니 컬렉션’ 보유국은 한국
문제는 국가의 지원이나 박물관 등의 후원을 받은 서구 열강의 중앙아시아 탐험과 달리 사찰의 자금을 사용하다 보니 니시혼간지의 재정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것이다. 결국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14년 5월 문주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인류의 문화 보고도 뿔뿔이 흩어지는 운명에 놓였다. 오타니는 유물 중 일부는 박물관에 기증하고 나머지 유물은 1914년 11월 자신이 중국 여순으로 갈 때 가지고 갔다. 1916년 11월에는 남아 있는 유물과 저택을 사업가이자 정치인인 구하라 후사노스케에게 헐값에 매각했다.
이후 구하라는 조선 광산 채굴권을 얻기 위해 1916년 5월 데라우치 조선 총독에게 이 유물을 기증하고, 데라우치는 1945년 광복 때까지 경복궁 수정전에 유물을 보관했다. 오늘날 한국이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 최대 ‘오타니 컬렉션’ 보유국이 된 이유다. 일본의 오타니 수집품 일부는 니시혼간지에 있다가 현재는 류코쿠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다른 유물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현재는 도쿄국립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한국에 보관된 유물들은 6·25 때 폭격으로 여자 미라가 훼손되는 등 자칫하면 잿더미로 사라질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박물관 직원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미군의 협조 덕에 부산으로 옮겨져 무사했다.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500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질적인 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고 중앙아시아 벽화 연구에 귀한 자료들이다. 특히 2차대전 중 베를린에 소장된 서역 벽화가 폭격으로 많이 소실되어 한국에 보존된 서역 불교 벽화가 더욱 희귀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오타니 탐험대가 이렇다 할 학문적 뒷받침이나 후원자 없이 불교에 대한 열정만으로 빼내온 것이기에 ‘오타니 컬렉션’이 거칠다는 점이다. 전문학자가 참여하지 않아 유물의 발견지와 출토지 등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와 기록이 없는 것은 물론, 유일한 운반 수단인 낙타에 실을 수 있을 만한 무게로 벽화를 자르다 보니 훼손이 심했다. 유물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짝이 맞지 않는 벽화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유물이 어떻게 어디로 흘러갔는지 유물의 내력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오늘날 상당수 벽화 유물의 출토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서역 일대를 부지런히 답사한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 연구자들의 공이다.
현재 오타니 유물은 한·중·일 합쳐 모두 5,000여 점이다. 이 유물들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의 여순박물관,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 등에 수장되어 있고 문서류는 니신혼간지가 설립한 교토의 류코쿠대가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