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1895년 : 스벤 헤딘 중앙아시아 1차 탐험 시작

서양인들이 밟아보지 못한 길을 뚫고 간다는 탐험 원칙 고수

스벤 헤딘(1865~1952)은 탐험가이면서 지리학자였다. 실크로드 역사에 관심 있는 애호가들이라면 첫손에 꼽는 탐험가의 신화다. 그는 서양인들이 밟아보지 못한 길을 뚫고 간다는 탐험 원칙을 고수하면서 기존 지도의 공백을 메우는 데 탐험의 주안점을 두었다. 그가 숱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걷고 오르고 건넌 2만㎞의 길은 꼼꼼한 측량지도로 만들어졌고 이 지도는 후대 탐험가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당시 열강도 영토 확장을 위한 싸움에 그의 지도를 이용했고 2002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의 군사지도 역시 100년 전 헤딘의 지도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도는 정확했다.

헤딘은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인더스 강의 수원을 확인하고 트랜스히말라야 산맥을 히말라야 산맥과 평행을 이루는 독자적인 산맥으로 구분했다. 특히 실크로드 서역 남로의 중계 거점이던 고대 도시국가 ‘누란’의 발견은 그 절정이었다. 이밖에도 타클라마칸 사막, 우랄 산맥, 파미르 고원, 티베트 등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여정에서 발견한 각종 유적들은 고대 중앙아시아의 문화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헤딘은 탐험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산소호흡기 없이 히말라야 산맥을 오르고 영하 30도와 영상 40도의 기후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티베트에서는 2번이나 붙잡혔으며 강도와 들짐승의 공격에 수없이 노출되었다. 그래도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열정이 식지 않아 늘 일기장과 스케치북을 갖고 다니며 세밀한 기록을 남겼다.

헤딘은 탐험가라고 하기에는 체격이 지나치게 왜소하고 약골이었다. 게다가 눈병까지 앓았다. 그럼에도 반 세기 동안 험난한 탐험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강한 결단력과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집념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헤딘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처음 탐험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오로지 탐험을 위해 모든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었다. 스톡홀름대에서 지질학, 물리학, 동물학 등을 배우고 독일의 베를린대에서 자연지리학을 공부한 것도 탐험을 위해서였다.

 

탐험 과정에서 죽을 고비 여러 차례 넘겨

헤딘의 1차 탐험은 1895년 2월 지금은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속하는 카슈가르에서 시작되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면서 사막을 흐르는 야르칸드 강과 호탄 강 사이의 지역을 실지 측량해 지도를 만드는 것이 1차 탐험 목표였으나 모래 속에 묻혀 있다는 전설 속의 도시를 발굴하겠다는 의욕도 내심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살인적인 더위와 극심한 갈증 속에서 측량을 끝내고 1895년 6월 카슈가르로 돌아왔을 때 동행했던 현지인 중 2명은 이미 사막에서 낙오된 상태였고 낙타 여러 마리는 죽고 없었다.

헤딘이 1895년 12월 다시 카슈가르를 출발해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에 위치한 호탄에 다다랐을 때 “동북 방향으로 사막 깊숙이 들어가면 신비한 도시가 모래 속에 파묻혀 있다”는 말을 현지 주민에게서 들었다. 오늘날 ‘단단위리크’로 불리는 그곳에 도착하자 사구((沙丘) 위로 삐죽이 솟아있는 나무 기둥들과 일부 벽들이 눈에 들어왔다. 헤딘은 고고학자가 아니라 지리학자였기 때문에 도시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엄청난 것을 발견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결국 그는 과학적인 발굴을 지휘할 만한 지식·시간·장비가 없어 모래에 뒤덮인 건물 몇 채만 조사하고 중단했다. 비록 과학적인 조사는 하지 못했지만 그는 사막의 저 깊은 곳에 고고학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그곳을 떠났다. 헤딘은 호탄으로 돌아와 1896년 신비의 땅 티베트를 향한 첫 탐험길에 올랐다. 그러나 티베트의 수도 라싸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북경을 경유해 스웨덴으로 귀국했다.

 

죽음의 위험 무릅쓰면서 꼼꼼한 지도 만들어

헤딘이 2차 타클라마칸 탐험을 감행한 것은 1899년 9월이었다.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야르칸드 강과 그 강이 합류하는 타림 강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는 게 2차 탐험의 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막 한가운데 있는 로프노르 호수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타림 강은 사막 안쪽의 로프노르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데 지난 수년간 호수가 이동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딘은 수수께끼를 바로 풀지는 못하고 훗날 “로프노르 호수가 1600년을 주기로 남북으로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로프노르 호수는 이후 건조화가 진행되다가 1962년 완전히 사막 속으로 사라졌다.

헤딘은 1900년 1월 타클라마칸 사막 동쪽 끝과 맞닿아 있는 로프노르 사막에서 모래 밖으로 삐죽이 나와있는 목조상 몇 개를 발견했다. 그러나 당장은 식수가 부족해 발굴 조사는 뒤로 미루고 남쪽의 험준한 곤륜산맥을 넘어 2차 티베트 탐험에 나섰다. 이 탐험도 현지 관리인의 제지로 라싸에 들어가는 데 실패하자 헤딘은 로프노르 사막 속에서 발견했던 그 신비한 유적지로 다시 돌아갔다.

1901년 3월 발굴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로슈티 문자로 쓰인 목간(나무로 된 편지)과 한자가 적힌 지편(紙片) 수십 점이 나왔다. 카로슈티 문자는 기원전 2~3세기부터 수백년 동안 인도의 북서부 쪽에서 사용하던 문자였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발견된 필사본은 그곳이 고대 오아시스 도시 ‘누란’의 유적지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누란은 중국에서 출발한 실크로드 서역행 길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동서 중계 거점으로 자리잡은 후, 기원전 1세기부터 크게 번성하다가 5세기 무렵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고대 문명지였다. 1500년 만에 누란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전 세계의 지리학자와 역사학자들을 흥분시켰다.

헤딘은 1906년 시작된 3번째 티베트 탐험을 1908년에 마치고 인도와 중국을 거쳐 1908년 11월 일본을 방문했다. 이토 히로부미 조선 통감의 초청으로 조선도 12월 12일 방문했다. 그는 10여 일간 조선에 머물며 강연하고 고종과 순종, 구미 각국의 외교관을 만난 뒤 12월 말 만주를 거쳐 하얼빈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갈아타고 귀국했다.

헤딘은 측량지도를 제작하고 사라진 고대 도시를 발견하는 등 탐험가와 지리학자로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으나 정치적 행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1차대전 때는 친독일 르포 기사를 써서 영국왕립지리학회에서 제명당했고, 2차대전 때는 친나치 성향의 기고와 저술 활동을 해 비난을 받았다. 노년기인 1926~1935년에도 중국 학자들과 함께 서북 지방 조사단을 꾸려 실크로드를 재조사하면서 중국 한대의 목간들을 대량 발굴하고, 방황하는 사막 호수 로프노르의 동서이동설 등을 고증하는 등 실크로드학의 태반을 이루는 업적을 계속 쌓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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