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시작’이면서 ‘근대성의 시작’
인류는 유사 이래 물체의 존재와 운동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우주는 신화와 미신의 대상이었다. 이 무질서와 혼돈의 안개를 걷어버리고 물체와 우주의 질서를 규명한 이가 아이작 뉴턴(1642~1727)이었다. 그는 영국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가 2년 후 재혼하는 바람에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겪었던 모성 결핍은 그를 은둔으로 내몰았다.
뉴턴은 런던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1665년 전국적으로 퍼진 흑사병을 피해 귀향했다. 고향에 있던 어느 가을날,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문득 만유인력의 원리를 깨달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때의 상상력은 20년이 지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공표되었다. 또한 20대 약관의 나이에도 거의 직관적으로 근대 미적분학, 중력이론, 천체역학, 광학이론의 토대가 된 숱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뉴턴이 만년의 회고담에 “나의 모든 작업은 1665년과 1666년의 대유행병이 휩쓴 2년 동안에 성취된 것”이라고 썼듯 과학계에서는 1665~1666년을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뉴턴은 흑사병이 잠잠해지자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케임브리지대 특별연구원을 거쳐 교수가 되었다.
사실상 20대에 모든 걸 완성한 뉴턴은 30대 들어 자연과학보다 연금술과 성경 연구에 관심을 쏟았다. 특히 신학에 관심이 많아 4세기에 확립된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당시는 연금술과 삼위일체 교리 부정이 모두 지탄의 대상이었던 터라 뉴턴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외부와 공유하지 않고 일기 형식으로 정리해두었다.
‘모든 힘이 작용하는 곳에는 가속도가 존재한다’는 법칙, 물리학의 새 지평 열어줘
40대에는 자신의 연구 업적을 집대성한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1687년 7월 5일 발간했다. 모두 3권으로 구성된 ‘프린키피아’ 1권에서는 ‘힘이 주어질 때 물체는 어떻게 운동하는가’라는 운동법칙이 일반 원리 형태로 제시되었다. 오늘날 익히 알려진 3가지 운동법칙 즉 관성의 법칙(제1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제2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제3법칙)이 그것이다. 2권에서는 데카르트식 우주관과 케플러 법칙이 모순됨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3권에서는 만유인력을 도입해서 지구와 우주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이 중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 ‘힘=질량×가속도(F=ma)’로 정리된 가속도의 법칙이라고 입을 모은다. 관성의 법칙과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역학 체계를 다룬 내용인 반면, 가속도의 법칙은 뉴턴이 창안한 새로운 내용이기 때문이다. 모든 힘이 작용하는 곳에는 가속도가 존재한다는 이 법칙은 물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뉴턴의 또 하나 위대함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미분과 적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프린키피아’의 높은 수학적 완성도는 미적분 덕분이었다. 뉴턴은 스승인 아이작 배로의 수학 연구를 본받아 여러 무한급수의 합을 구하는 방법을 연구해 미적분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뉴턴은 생전에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건 바로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뉴턴이 말하는 거인은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다. 갈릴레오의 역학이론과 케플러의 세 가지 행성운동법칙,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프린키피아’는 케플러의 법칙이 수학적으로 성립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것이다.
‘프린키피아’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초판 1,000권도 다 팔리지 않았다. 내용이 워낙 어려워 당대의 과학자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오늘날 ‘프린키피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물리학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물리학 책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수학적 추상과 종교적 신비 속에서 살아
‘프린키피아’는 세상의 원리와 우주관만 혁명적으로 바꾸어놓는 데 그치지 않았다. 18세기 계몽사상은 뉴턴의 우주관과 인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계몽철학자들은 뉴턴의 자연철학에 힘입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문화적 현상에서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법칙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뉴턴은 ‘과학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성의 시작’으로도 불린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여자에 대한 소문조차 없었고 다른 남자와 우정을 나눴다는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공간적으로는 240㎞ 밖을 벗어나지 않았고 시간적으로는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수학적 추상과 종교적 신비 속에서 살았다. 성격적으로는 신경질적이었고 독단적이었다. 자신의 연구와 삶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과 온갖 치졸한 방법으로 싸움을 벌였다. 영국왕립학회에 실린 광학에 관한 자신의 논문을 비판한 로버트 훅이라는 학자와는 31년 동안이나 논쟁을 벌였으며 1675년 미적분법을 발표한 독일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와도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는 문제를 놓고 수학 역사상 가장 격렬한 논쟁을 30년 동안 벌였다.
라이프니츠가 미적분법을 발표했을 때 뉴턴은 미적분은 자신이 먼저 고안한 것이고 라이프니츠가 그것을 훔쳤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과학사가들은 뉴턴이 ‘기적의 해’에 미적분법을 고안한 것은 맞다고 인정한다. 그것을 원고로 작성해 1669년 스승 아이작 배로에게 보여준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뉴턴은 이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고 라이프니츠는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런데도 뉴턴이 이런 정황을 인정하지 않아 다툼은 1716년 라이프니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뉴턴은 왕실 조폐국장으로 일할 때도 위조범을 잡으면 사정없이 사형을 집행하는 잔인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뉴턴의 업적이 너무 뛰어나 뉴턴이 무슨 말을 하건 그의 말은 절대적인 진리처럼 받아들여졌고 동시대인들은 “신에 가장 근접한 인간”으로 칭송하며 신격화했다. 묘비명의 마지막 구절 “인류에게 위대한 광채를 보태준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을 생명이 있는 자들은 기뻐하라”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일생을 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