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즉위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
고종(1852~1919)은 조선조 역대 군주 가운데 영조(52년)에 이어 두 번째로 긴 44년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았다. 고종이 1864년 1월(이하 양력)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할 무렵 조선조는 외척 세력이 전횡을 일삼는 세도정치 하에서 망국의 길을 치닫고 있었다.
고종의 즉위 역시 세도정치의 갈등과 대결 속에서 이뤄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 때문에 즉위 후 10년간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1873년 12월 친정(親政)을 시작하며 겨우 홀로서기에 나섰을 때도 권력을 되찾으려는 흥선대원군, 답답한 세상을 뒤엎으려는 개화파와 동학농민운동 세력,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청·러시아·일본 등이 끊임없이 고종의 옥좌와 한반도를 노려 정상적인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집권 후반기에는 고종의 목숨을 노린 것을 포함해 10번 이상의 쿠데타 음모에 시달렸다.
고종은 친정 후 개방과 개화를 추구했다. 비록 자발적인 결정은 아니었지만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882년 7월 예상치 못한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이를 빌미로 청국이 속방화 정책을 폄으로써 개방개화 정책은 위기를 맞았다. 이후 10여 년간 무기력한 시기를 보낸 것으로도 모자라 1894년 7월 일본에 경복궁을 침범당하는 수모를 겪고 1895년 10월 왕비가 시해당하는 수난까지 겪었다.
더구나 을사조약(1905)이라는 미증유의 사건을 당해 오늘날 고종에 대한 이미지는 ‘흥선대원군의 등에 업혀 있거나 마누라(민비)의 치마폭 속에 있다가 결국은 나라를 망친 왕’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물론 “결과적으로 시대적 격랑 속에서 헤쳐나오지 못한 것일 뿐 근대화를 추진한 개명군주”라는 반론도 있지만 일본의 물리력을 막지 못해 결국 나라를 통째로 내주었다는 불명예를 피하진 못했다.
1864년 1월(음 1863.12)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
고종은 1864년 1월 21일(음 1863.12.13)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했다. 전임 왕인 철종은 후사가 없었고 살아 있는 왕실의 혈족으로는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신군의 후손(입양자)이 유일했다. 사도세자는 부인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정조를 낳았고 궁녀들에게서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세 아들을 얻었다. 은언군의 손자는 철종이었고, 은신군은 17세에 아들 없이 죽어 사후에 남연군을 입양자로 삼았다. 이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대원군이다. 은전군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후사 없이 죽임을 당했다.
철종의 재위기간(1849~1864)은 안동 김씨가 무소불위의 전횡을 행사하는 세도정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은 병약한 철종 사후, 혹여 왕실 종친으로 남아 있는 자신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까 늘 불안했다. 그래서 자신이 왕실 후계에 미련과 능력이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에는 야망을 불태웠다. 궁중의 최고 어른인 신정왕후(조대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그 일환이었다.
1864년 1월 17일 철종이 승하하고 조대비가 “흥선대원군의 적자 중에서 둘째 아들 이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대통을 계승케 하라”고 지시를 내리면서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꿈은 구체화되었다. 익종은 순조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자에 책봉되고 조대비와 결혼했으나 왕위에 오르기 전 21살에 병사해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고종을 익종의 양자로 삼은 것은 새로 등극한 왕이 어리면 성장할 때까지 모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데 만약 고종을 철종의 양자로 삼는다면 조대비가 아닌 철종의 왕후 즉 철인왕후(안동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어서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이 아니고 둘째를 선택한 것은 이재면이 19살의 성인이고 고종은 12살에 불과해 수렴청정이나 섭정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조대비는 1864년 6월 조두순을 영의정으로 임명, 조정을 풍양 조씨가 독주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의 총책임을 맡아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1866년 2월에는 조대비가 3년 만에 수렴청정을 거둬들여 전권이 대원군 손에 쥐어졌다.
고종에게 친정(親政)의 기회를 제공해준 것은 최익현의 상소
고종은 14살 때인 1866년 5월, 한 살 위인 민왕후(민비)를 왕비로 맞았다. 대원군이 그녀를 아들의 배필로 점찍은 데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우선 자신의 할머니·어머니·부인과 같은 여흥 민씨 집안이고 민왕후의 아버지 민치록이 죽고 없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사돈이 없다는 점에서 착안한 결정이었다.
고종은 나이가 들면서 친정을 꿈꿨다. 민비를 비롯해 여흥 민씨들도 고종이 직접 정사를 주재하지 못하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이런 고종에게 친정의 기회를 제공해준 것은 대원군의 실정을 공격하는 최익현의 상소였다. 최익현은 1868년 10월 경복궁 중건 공사 중지, 원납전 징수 금지, 당백전 폐지 등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것으로 대원군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고종이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최익현의 2차 상소 때였다.
최익현은 1873년 12월 14일, 2차 상소에서 대원군이 전국의 사원을 철폐하고 청나라 돈을 수입해 경제 질서를 훼손했다며 대원군을 비난했다. 조정의 대신들이 최익현의 처벌을 청했으나 고종은 상소를 문제 삼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래도 최익현이 12월 22일 또다시 상소를 올리자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보내고 친대원군 대신들은 대대적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별도의 선언이나 기념식 없이 친정을 시작했다.
대원군은 거처하던 운현궁을 떠나 경기도 양주로 내려갔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대원군을 모셔와야 한다는 유생들의 상소문이 빗발쳤다. 대원군이 다시 기세를 올린 것은 1875년 9월 일본이 강화도에 침입해 살육·약탈·방화한 운요호 사건 후였다. 고종이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여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대원군과 위정척사파가 연대해 반대 세력을 형성했다. 경복궁 안에서 화재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대원군이 마침내 아들에게 칼끝을 겨눈 것은 1881년 10월이었다. 대원군을 등에 업은 일부 세력이 이재선(고종의 이복형)을 왕으로 추대해 대원군을 권좌에 복귀시키려는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발각된 것이다. 체포된 자들은 모두 대원군과 가까운 인물이었고 역모의 배후에 대원군이 있음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다수 관련자가 처형되고 이재선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2월 18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처럼 대원군의 공세를 꿋꿋하게 지켜내던 고종이 자진해서 권력을 대원군에게 내놓은 것은 1882년 7월 발발한 임오군란 후였다. 고종은 군란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자 민중의 지지를 받는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사태 진정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 대원군은 10년 만에 권토중래했고 고종을 대리해 정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상륙한 청군은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을 비롯해 친대원군 계열의 무장들을 체포하고 투옥했다. 대원군도 중국으로 압송해 3년간 연금했다.
개혁과 자주의 가장 큰 걸림돌은 청나라
대원군이 국내에 없는 사이 조선에서는 1884년 12월 4일(음력 10.17) 갑신정변이 일어나 그동안 고종이 후원했던 젊은 개화파들이 죽거나 망명하는 등 몰락했다. 고종의 권위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급전직하로 추락했다.
이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날 때까지는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렸다. 도를 넘은 청나라의 간섭과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로 겉으로는 나라가 평화로웠으나 속으로는 곪으면서 세월만 헛되이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고종이 마냥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외국어 학습을 위한 육영공원을 설치하고 배재학당·이화학당 등 개화 학문을 배우는 학교를 후원했으며 조선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문제는 세도 가문을 이루며 정권을 농단한 여흥 민씨 일족이었다. 민씨 일족 중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차지한 자만 1,000명이 넘었다. 이들의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는 민심 이반을 자초해 조선의 앞날을 어둡게 했다. 고종 또한 민씨 척족의 매관매직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면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개혁과 자주의 가장 큰 걸림돌은 청나라였다. 청나라는 고종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이라는 두 번의 변란을 겪고도 청나라에서 독립하려는 의지를 꺾지 않자 1885년 10월 억류하고 있던 대원군을 돌려보내 고종을 견제하게 했다. 대원군은 조선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청의 사절 원세개와 짜고 1886년 자신의 손자이자 이재면의 아들인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불발로 끝났다.
고종이 자기 자신과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 내정의 폐단은 곪을 대로 곪고 있었다. 1885년부터 1893년까지 전국에서 32차례의 크고 작은 민란이 일어났다. 1894년 2월에는 민중의 한과 분노가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했다. 조선 정부의 진압 요청에 따라 1894년 5월 청군이 조선으로 파병되자 일본도 청국과 맺은 천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파병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동학농민운동 세력은 조정과 ‘전주화약’을 체결한 뒤 해산했다. 소요가 진정되었으니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군해야 했으나 그대로 눌러앉았다.
이처럼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1894년 6월 21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하고 고종을 강제 연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6월 23일에는 일본 해군이 충남 아산만 앞바다의 풍도 근해에서 청군 군함을 격침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거한 뒤 대원군을 옹립하고 김홍집·박정양 등 친일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된 군국기무처를 설립해 정부 변혁을 꾀했다. 일본으로서는 격앙된 조선 백성의 지지를 받는 대원군과 손을 잡아 일본의 침략 행위를 희석하고 반일 감정을 무마할 필요가 있었다.
‘을미사변’ 후 경복궁에 강제 연금당해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 이튿날 고종은 대원군에게 권한을 넘긴다는 전교를 내렸다. 이로써 대원군은 임오군란 시기의 2차 집권에 이어 3차 집권을 하게 되었다. 고종으로서는 다시 한 번 권좌를 아버지에게 내주는 통한의 순간이었다. 대원군은 한껏 고조된 상태에서 입궐하자마자 고종의 실정을 나무랐다. 2~3개월 후에는 손자인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 사건까지 일으켜 부자 관계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단계로 악화했다.
그래도 군주는 여전히 고종인지라 일본은 고종을 강요해 7월 27일 김홍집을 의정부 영의정 겸 내정 개혁의 본부격으로 그날 새로 설치한 군국기무처의 총재로 임명했다.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은 부총재로 임명해 갑오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이른바 갑오파로 불리는 김홍집·박정양 등은 청나라와 민씨 척족 정권에 반감을 품고 있는 개화 그룹이었다.
그러던 중 일본은 대원군이 1894년 말부터 은밀히 청나라․동학군과 내통해 반일 공작을 펼치는 것을 알게 되자 고종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 결과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에게 정권을 돌려주는 대신 고종이 일본의 감독 역할을 인정하고 박영효·서광범·윤치호·서재필 등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거나 친일 성향을 띤 개화파 지도자들을 사면·귀국시켜 각료로 기용한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1895년 4월 삼국간섭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삼국간섭은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 후 청국과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1895.4)에 따라 중국의 요동반도를 차지하려 하자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요동반도를 중국에 되돌려주라고 간섭한 것이다.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를 돌려주었고 국제적 지위가 실추했다.
그러자 조선 조정에서는 러시아가 일본보다 더 강하다고 판단해 러시아 정부와의 친선을 도모했다. 왕실의 이런 친러 분위기에 힘입어 박정양·안경수·이완용·이범진 등의 친미·친러적인 정동파가 부상했다. 고종은 1895년 5월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을 무너뜨리고 박정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새 내각을 구성했다.
박정양은 박영효(내무대신)와 함께 연립내각을 이끌었으나 사실상의 실권은 내각, 군부, 경찰 등의 핵심 요직에 자신의 측근들을 포진시킨 박영효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박영효가 주도한 민비 시해 역모사건이 드러나 박영효는 7월 초 일본으로 또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이로써 박정양 내각이 무너지고 다시 김홍집 중심의 친일 내각이 조직되었다.
그러던 중 1895년 9월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공사가 물러나고, 무식하고 난폭한 미우라 고로가 신임 공사로 부임했다. 미우라는 일본의 대조선 정책의 걸림돌이자 조선 정부의 핵심 인물인 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난입, 민비를 시해하는 이른바 ‘을미사변’을 자행했다. 고종은 경복궁에 강제 연금했다.
‘나라를 망하게 한 왕’ 부정적 인식 많아
불안해진 고종은 1895년 11월 28일 새벽, 이른바 ‘춘생문 사건’을 통해 경복궁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탈출을 시도해 1896년 2월 10일 새벽 가까스로 경복궁 건춘문을 빠져나가 오전 7시 정동에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아라사(러시아) 공사관을 의미하는 ‘아관(俄館)’에 임금이 궁궐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파천(播遷)’에 성공한 것이다. 이른바 ‘아관파천’이었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후 을미사변 관계자들을 참수하라는 조칙을 내리고 김홍집·어윤중·김윤식·유길준·정병하·이재면 등 김홍집 내각의 대신들을 면관(免官)했다. 이 때문에 김홍집과 정병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어윤중은 경기도 용인에서 성난 군중에게 타살당했다.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고 김윤식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대원군도 사실상 운현궁에 유폐되었다. 내각은 박정양(총리대신 겸 내부대신), 이완용(외부대신 겸 학부대신), 이범진(법부대신 겸 경무사), 윤치호(학부협판) 등 정동파 인사들로 채워졌다.
그런데 아관파천 직후부터 환궁을 요청하는 상소가 쇄도했다. 원로대신들도 환궁을 강력히 주장했다. 결국 고종은 환궁하라는 각계 요로의 상소와 청원을 받아들여 1897년 2월 20일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그로부터 반 년 뒤인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로 고쳐 부국강병의 의지를 천명하고 두 달 뒤인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국호를 ‘대한’으로 바꿔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조선 개국 500여 년 만에 중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천명했다. 비명에 간 민비도 명성황후로 추존했다.
대한제국을 출범시킨 후 고종은 황권의 절대화와 강력한 군대 육성을 꾀하면서 ‘광무개혁’으로 불리는 근대화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고종이 자주독립 국가를 꿈꾸며 실행에 옮긴 일련의 정책들은 사실 러시아와 일본의 팽팽한 세력 균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광무개혁이든 왕권 강화든 이 모든 것이 러일 간의 세력균형 위에서만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데 대한제국의 한계가 있었다. 결국 광무개혁이라는 이름의 근대화 작업은 미처 그 성과를 보기도 전에 1904년 2월 일어난 러일전쟁으로 종말을 고하고 조선은 일본의 국권 침탈에 의해 사실상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했다. 왕위에서 물러난 후 1907년의 정미7조약과 군대해산, 1910년의 한일합방까지 지켜보다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67세로 승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