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제주도 이재수의 난

선교사들이 사사건건 지방행정에 간섭

조선이 쇄국의 시대를 마감한 기점은 1876년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강화도 조약’이다. 이후 미국(1882)과 독일(1883)에 이어 프랑스와 ‘선교의 자유’ 조항이 포함된 조불수호통상조약(1886)을 체결함으로써 천주교 박해 시대도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조불수호통상조약 덕분에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온 천주교회는 파격적으로 치외법권과 영사재판권을 보장받았다. 천주교인이라면 설사 조선인이라도 행위가 무엇이든 조선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았으며 천주교인과 관련된 사안은 프랑스인 신부가 재판을 하고 형을 내렸다. 당시 프랑스 신부들은 고종이 지급한, ‘임금인 나를 대하듯 프랑스 신부들을 존경하라’는 뜻의 ‘여아대(如我待)’라는 패찰을 갖고 다니면서 안전을 보장받았다.

선교사들은 걸핏하면 패찰을 내 보이며 사사건건 지방행정에 간섭했다. 그러자 신앙과는 무관하게 이권을 좇아 천주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증가했다. 당시 국내에서 발행된 영문잡지 ‘코리아 리뷰’는 주민들이 천주교에 입신한 신앙외적 동기에 대해 ▲약과 설탕을 얻을 수 있다 ▲관리와 동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죄를 짓더라도 성당에 들어가면 못 잡아간다고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1895년부터 10여 년간 전국에서 300여 건의 교안(종교적 충돌)이 일어났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충돌이 잦았다.

제주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먼저 반발한 것은 점쟁이와 무당들이었다. 그들은 점쟁이나 무당 말을 들으면 죄가 되고 죽어서도 천당에 갈 수 없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맹렬히 비난했다. 천주교 측이 당산목이나 신당을 불사르는 등 제주도 전래의 전통을 무시하는 것도 도민들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천주교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이권을 챙기려는 일부 천주교 신도들의 과도한 행동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사이비 천주교인들은 교당에 형틀과 투옥 시설을 갖춰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 주민들을 잡아다 린치를 가하기도 했다.

여기에 정부의 조세정책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정부는 1897년 대한제국으로 탈바꿈한 후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돈이 없었다. 그러자 그동안 지방관아가 징수해 사용하던 지방세를 국세로 전환해 봉세관(세금 징수관)을 지방에 파견했다. 세금 수탈로 사리사욕을 채우던 지방의 수령들이 이런 봉세관을 좋아할 리 만무였다. 결국 봉세관들은 지방 수령의 협조를 얻지 못해 세금 징수에 어려움을 겪었다.

 

제주도민, 민관 합동 자위단 조직인 ‘상무회’ 결성

제주도에 파견된 봉세관 역시 수족 역할을 해야 할 세리를 구하지 못하게 되자 잇속을 챙기기 위해 천주교에 입교한 일부 교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봉세관은 천주교인을 세리로 확보해 본격적으로 징세 활동을 전개하고, 전교에 어려움을 겪던 성당 측에서는 갑자기 신자 수가 늘어나 선교에 활기를 띠니 양쪽 모두에게 득이 되었다. 조세 징수권을 위임받은 천주교인들은 온갖 세금을 만들어 행패를 부렸다.

그러던 1901년 2월 9일 대정군에서 천주교인 오달현과 오창우 등이 교인들을 이끌고 마을 유지인 현유순의 집을 습격해 현유순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천주교를 배척하던 오신락을 잡아다 교당에 가두고 고문하다가 오신락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천주교인들은 오신락 노인이 감나무에 목매달아 자살했다고 했고 노인의 아들은 천주교인들에게 매를 맞아 죽었다고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01년 4월 초 세폐와 교폐를 호소하기 위한 민관 합동 자위단 조직인 ‘상무회’가 결성되었다. 대정군수 채구석과 향촌 조직인 대정향청의 향장인 오대현 등이 주도한 이 결사체에는 천주교인들과 봉세관의 횡포에 대한 자위책으로 지방관리, 농민, 상인 등이 초계급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채구석을 대표로 추대하고 봉세관의 탐학과 천주교인들의 비행을 성토했다.

4월 29일에는 송희수 상무사 위원 집이 수십 명의 천주교인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송희수는 천주교인들에 의해 대정 읍내로 끌려갈 뻔했으나 주민들의 항의 덕에 겨우 빠져나왔다. 그러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오대현 등 수십 명의 상무사 회원이 대정의 천주교당을 습격, 교당을 부수고 교인을 폭행했다. 5월 중순에는 인근 정의군 주민들과 함께 교폐와 세폐에 쌓인 한을 제주목사에게 호소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제주성으로 갔다. 그 인원이 몇천 명이나 되었다.

제주성에 있던 800여 명의 천주교인은 신부 마르셀 라크루와 함께 총칼로 무장한 채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일부는 대정과 제주성의 중간 지점인 명월진에서 잠을 자고 있던 간부들을 습격, 오대현을 비롯한 우두머리 6명을 납치했다. 그때가 1901년 5월 14일이었다.

 

천주교와 토착신앙 간의 충돌

분노한 대정군민들이 인근의 제주군, 정의군 등에 격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군민들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항쟁은 제주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도민들은 이재수(1877~1901)와 강우백을 새로운 장두로 뽑은 뒤 각각 서진과 동진으로 나눠 제주성으로 몰려갔다. 이재수는 대정군의 관노 출신이었고 강우백은 향촌 말단조직인 월평리의 이장이었다. 이는 민란 지도부의 계급적 성격이 달라지고, 평화적·타협적 노선이 비타협적 노선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했다.

그들은 출발에 앞서 장정과 포수를 그러모았다. 그렇게 모인 장정이 몇천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제주성으로 쳐들어가 5월 28일 제주성을 함락했다. 이재수는 천주교인들의 죄상을 일일이 성토하면서 민가에 숨어 있는 천주교인을 모조리 색출·처단하라고 호령했다. 도민들은 성안은 물론 성밖의 천주교인들까지 수색해 살육했다. 그렇게 피살된 천주교인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곧 제주도 신임 목사와 프랑스군을 태운 2척의 프랑스 군함이 도착하고 6월 초에는 황실 고문인 미국인 샌즈와 정부군 100여 명이 도착해 제주성을 장악했다. 민군과 정부군은 교폐·세폐를 근절하고 민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민군을 해산하고 화해하기로 합의했으나 정부군은 약속과 달리 6월 11일 민란의 지도자인 채구석·오대현·이재수 등 주모자들과 봉세관 강봉헌을 잡아들였다.

서울 평리원에서 열린 재판 결과 10월 9일 오대현·강우백·이재수 등 주모자들은 교수형을, 채구석 등 선동자들은 징역을 선고받았다. 프랑스가 요구한 피해액은 정부가 갚고 이자는 제주도민들이 십시일반 모아 프랑스인들에게 배상했다. 천주교 측은 이 사건을 ‘신축교난’ 혹은 ‘신축교안’이라고 하고 주민들은 ‘이재수의 난’으로 부른다. 당시 전체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교회 측에서는 대략 500-7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고 그 무렵 제주에 유배와 있던 김윤식의 ‘속음청사’에는 500-6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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