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몰락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시대의 기록자
황현(1855~1910)은 시대의 아웃사이더이자 초야에 묻힌 선비였다. 그러면서도 나라의 현실을 가슴 아파한 우국지사였고 조선의 몰락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시대의 기록자였다.
황현은 전남 광양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하지만 시골의 한 귀퉁이에서는 만족할 만한 스승과 문장가를 찾을 수 없어 19세 때 서울로 상경해 글로써 세상을 논하자며 서울의 내로라 하는 논객들을 찾아다녔다. 시골뜨기 선비가 서울의 최고 문인들에게 서슴없이 도전장을 낸 격이다. 다행히 그의 재주를 알아보고 그와 마음이 통하는 문인들을 만났는데 이건창·강위·김택영 등이 그들이었다. 이건창은 황현의 글을 가리켜 “붓끝의 기백은 반고(후한 시대 사가)가 눈에 차지 않는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황현은 28세 때인 1883년 특별 보거과에서 장원을 했다. 그러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1등에서 2등으로 밀려난 것을 알고는 고향으로 내려가 독서와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34세 때인 1888년, 생원 초시에 장원 급제해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탐관오리들이 세상을 농락하는 현실에 환멸을 느껴 벼슬길을 포기하고 또다시 낙향해 1890년 전남 구례의 서재에 칩거하면서 ‘매천야록’, ‘오하기문’, ‘동비기략’의 저술에 몰두했다.
그가 독서로 세월을 보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벗들이 거듭 상경을 요청했으나 “어찌하여 나를 귀신같은 나라의 미친놈들 속에 들어가 같이 미친 사람이 되라 하는가”라며 일갈했다. 당대 세도가들의 교제 요청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는 사마천을 본받아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그것을 후세에게 남기고 싶어했다.
특히 ‘매천야록’은 비극의 현장 기록서였다. 대원군의 집정이 시작된 1864년부터 나라를 잃은 1910년까지 47년 동안, 정치 중심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당대의 살아 있는 사회·문화·생활상을 모두 6권 7책의 매천야록에 빠짐없이 기록했다. 매천야록에서 돋보인 것은 유려한 문체,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비판 정신이었다. 새로운 남녀 관계, 여학교의 설립 모습, 신식 혼인, 심지어는 1907년 관청에서 요강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까지 사회 풍속도 세세히 기록했다.
“매천의 붓 아래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
그의 꼬장꼬장한 직필은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 즉 “매천의 붓 아래서는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평이 있을 만큼 추상같았다. 붓끝은 날카로웠고 거침이 없었다. 여흥 민씨들의 부패, 외척 세도의 발호,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 국채보상운동의 문제점 등 그 내용의 방대함과 상세함은 가히 신문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는 동학농민운동의 동학도조차 ‘비도(匪徒)’로 보고 그들이 나라를 망치는 데 일조했다고 믿었다. 그에게 동학은 ‘굶주린 백성을 선동하는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단발령 후 일어난 의병 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은 신랄했다. “진실로 나라를 사랑하는 의병들은 몇 되지 않는다”며 “대부분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이 떼지어 따라다니며 약탈하고 강간을 자행하는 광도에 다름 아니다”라고 기록했다. 갑신정변의 개화당에 대해서도 “인명 살육을 서슴지 않는 도적이나 역당(逆黨)”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은 매우 싫어하면서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민간의 물건을 돈 주고 살 정도로 군율이 엄격하다는 사실을 예로 들며 일본군의 훌륭한 점은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다 보니 지나친 독설과 과장, 때로는 양비론에 빠져 있다는 지적이 없진 않지만 전체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예리하고 냉철했다.
그가 일생의 대부분을 두문불출하고 살면서도 이토록 상세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1,000여 권에 달하는 개인 장서, 신문·관보 등의 도움이 컸다. 할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700석의 재산도 평생 동안 시를 쓰고 매천야록을 남길 수 있었던 밑천이 되었다.
매천야록을 쓰고 있던 1905년, 을사조약의 비통한 현실을 당하자 황현은 ‘문변 3수’라는 시를 지어 을사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했다. ‘오애시’에서는 을사조약에 반대하다 자결한 민영환·조병세 등을 애도하고 그들의 우국충정을 기렸다. 또한 옛 중국의 난세에 몸을 깨끗이 가진 사람 10명을 뽑아서 그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지어 만든 ‘십절도십폭병’을 서재에 펼쳐놓고 그것을 보면서 마음가짐을 가다듬었다.
일본은 매우 싫어하면서도 일본군의 훌륭한 점은 그대로 드러내
1908년에는 전남 구례군 광의면에 호양학교를 세우고 신학문을 가르쳤다. 황현이 남긴 1,100여 편의 시와 글에는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생활 시, 기개와 충성 그리고 절개가 면면히 흐르는 우국 시가 많았다. ‘충무공 구선가’(1884)와 ‘의기 논개비’(1898) 등이 대표적인 우국 시다.
황현은 1910년 한일합방을 당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 어느 날 죽기를 결심하고 약을 먹었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아우 황원이 달려왔을 때 “내가 약을 삼키려다 입에서 뗀 것이 세 번이었다. 이다지도 어리석었던가”라고 말해 그 역시 죽음 앞에서는 몇 번이나 망설여야 하는 약한 인간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10년 9월 10일 새벽, 전남 구례 월곡리의 집에서 유서와 절명 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이 든 소주를 삼켜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나라가 선비 기르기 500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 죽는 자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라고 썼다. 절명 시에는 “새나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오 / 무궁화 우리나라 이미 망했구려 / 가을밤 등잔 밑에서 책 덮고 옛일을 되돌아보니 / 사람 세상에서 글 아는 이 노릇하기 어렵구나”라고 씌어 있었다.
그로부터 34년 후 아우 황원은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저항하다 1944년 2월 27일 유시 한 편을 남긴 채 독을 마신 뒤 집 근처 월곡저수지에 투신 자살함으로써 형과 같은 길을 걸었다.
황현의 저서들은 모두 사후에 출간되었다. 42수의 시와 51편의 글이 수록된 ‘매천집’은 중국으로 망명한 지인 김택영이 1911년과 1913년(속집) 상해에서 간행했다. 황현은 순절할 때 자손들에게 매천야록 원고를 외부 인사들에게 절대 보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후손이 책으로 피해를 입을까 염려해서였다. 자손들은 선친의 유언에 따라 책의 존재를 극비에 부치고 구례의 본가에 비장해 외부에 내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책의 존재가 뒤늦게 알려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한국사료총서’의 첫 기획으로 출간되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