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부채표·활명수 우리나라 최초 상표·상품 등록

활명수는 신통한 명약이자 생명을 살리는 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은 1897년 문을 연 동화약품이다. 두산그룹의 시원(始原)으로 인정받고 있는 포목점 ‘박승직 상점’이 그보다 빠른 1896년 창립되었지만 현재 두산그룹 어느 계열사에서도 포목 중개업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전문가들은 동화약품을 국내 최초의 기업으로 꼽는다.

동화약품의 창립일은 소화제인 ‘활명수’를 팔기 시작한 1897년 9월 25일이다. 창업 당시 소재지는 서울 중구 순화동 5번지였다.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의 간판을 처음 내건 사람은 궁중 선전관 출신의 민병호였다. 선전관은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 겸 경호실 요원이다. 민병호는 궁궐에 드나들며 친분이 있는 전의(왕실 의사)에게 궁중 비방을 전해 듣고 그 비방에다 양약의 장점을 가미해 달이지 않고 복용할 수 있는 약을 만들었다. 이를테면 대한민국 최초의 신약이었다. 민병호가 수많은 약 중에 소화제를 먼저 만든 것은 당시 가장 흔한 질병이 위장 장애, 소화불량, 급체였기 때문이다.

민병호는 ‘민족이 합심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민족 화합의 정신을 담아 회사명을 ‘동화(同和)’라고 지었다. 동화약품이 쥘부채(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를 상표로 선택한 것도 많은 부챗살이 한데 결속되어 부채를 만든다는 합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민병호는 자신의 아들 민강(1883~1931)을 초대 사장으로 세워 활명수를 판매했다. 활명수는 발매 초기부터 ‘궁중 비방’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임금이 먹는 약을 백성들도 먹을 수 있다고 화제가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배를 앓기 일쑤였던 백성들에게 활명수는 신통한 명약이자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다.

동화약방은 1909년 통감부에 ‘부채표’와 ‘활명수’를 상표등록했다. 그러자 곧 활명회생수, 활명액, 생명수 등 60여 종의 유사 제품이 난립해 이른바 ‘짝퉁 전쟁’이 벌어졌다. 유사 상품과 이름이 난립하자 동화약방은 1910년 8월 15일 상표 ‘부채표’를, 1910년 12월 16일 상품명 ‘활명수’를 조선총독부 특허국에 상표와 상품으로 등록했다. 191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유사 상표 방어용으로 ‘활명액’을 상표등록했다. 동화약방은 꾸준히 성장했으나 민강 사장이 독립운동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사세가 점차 기울었다.

 

1909년 통감부에 ‘부채표’와 ‘활명수’ 상표등록

민강은 1919년 3·1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그해 4월 조직된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했다. 비밀결사 조직인 대동단의 단원으로도 적극 활동했다. 대동단은 제1차 거사로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끝났다. 의친왕은 1919년 11월 만주 안동(현재의 단동)까지 갔다가 조선인 형사에게 체포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이 일로 대동단 간부는 거의 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민강도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에 앞서 민강은 1919년 7월 상해임시정부가 국내·외를 연결할 목적으로 만든 비밀 연락 조직인 서울연통부를 동화약방 내에 설치했다. 그리고 연통부를 통해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연통부는 1922년 일제에 적발되었고 이로 인해 민강은 갖은 고초를 겪다가 건강 악화로 1931년 1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민강이 유명을 달리하고 사세가 계속 기울자 1937년 민씨 일가는 동화약방을 민족기업가이며 독립운동가인 윤창식(1890~1963)에게 넘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M&A 사례였다. 윤창식 역시 보성전문 상과를 졸업한 뒤 1915년 3월 국산품 애용과 민족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 ‘조선산직장려계’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다 옥고를 치른 애국지사였다. 국내 항일 단체인 신간회의 간부를 맡기도 했다.

 

선금을 예치하고도 제품을 구입하기가 힘들 정도로 공급 부족 사태 빚어

윤창식은 제5대 사장 취임 후 가내수공업 수준에 머물던 동화약방을 현대적인 대량생산 체제로 바꿔나갔다. 이때부터 전통의 부채표 ‘활명수’는 본격적인 황금시대를 맞았다. 당시 활명수는 선금을 예치하고도 제품을 구입하기가 힘들 정도로 공급 부족 사태를 빚었다. 1937년 7월에는 활명수를 만주국에 해외 상표등록하고 1938년 12월에는 만주 안동에 동화약방 지점을 설치했다.

부채표 활명수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으나 6·25 전쟁으로 순화동 공장이 완전히 파괴되는 시련을 겪다가 전쟁이 끝난 후 공장을 복구하고 재기에 성공했다. 동화약방은 옛 명성을 되찾고 1962년 동화약품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활명수는 1965년 10월 처음 발매된 삼성제약 ‘까스명수’의 도전을 받았다. 까스명수는 당시 유행하던 탄산이 들어 있는 드링크였다. 동화약품은 대책 마련에 부심했고, 그 결과 1967년 4월 2년 만에 시장점유율을 역전시켜 예전의 영광을 되찾았다. 1990년대에도 활명수의 지명도를 등에 업고 유사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나자 동화약품은 ‘부채표 캠페인’을 벌여 브랜드 차별화에 나섰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광고 카피는 연일 사람들의 귀와 눈을 사로잡으며 금세 유행어로 등극했다. 이 광고는 국내 광고 역사에 기록될 만한 성공적인 캠페인이었다.

동화약품의 성장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게 ‘후시딘’이다. 1980년 발매된 후시딘은 ‘이명래 고약’과 ‘머큐로크롬액’(일명 아까징기)이 주도하던 상처 치료제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엎었다. 후시딘은 1994년 서울 정도 600년 기념행사에서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가정상비약을 대표하는 제품으로 선정되어 타임캡슐에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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