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버트런드 러셀 ‘수학 원리’ 출간

‘지식 탐구욕’이 수학자, 철학자, 문필가로 만들어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90세가 넘어 쓴 자서전에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했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썼다. 그의 말마따나 ‘지식에 대한 탐구욕’은 그를 수학자, 철학자, 문필가로 만들었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반전·반핵운동가, 교육 혁신가, 여권신장 운동가로 이끌었으며 ‘사랑에 대한 갈망’은 호색한이자 노련한 바람둥이로 살도록 했다.

러셀은 난봉꾼까지는 아니었으나 4번이나 결혼할 정도로 여성 편력이 화려했다. 심지어는 두 번째 아내와 살면서도 자신의 애인, 아내의 애인, 자신과 아내의 두 자녀, 그리고 아내가 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와 함께 한집에서 살기도 했다.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에는 “사랑의 감정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다”라고 맞받아치며 “연인과의 사랑이야말로 성인들과 시인들이 그려온 천국의 모습”이라고 찬미했다. 자서전에는 “사랑의 희열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기쁨의 몇 시간을 위해서라면 남은 여생을 모두 바쳐도 좋으리라”고 썼다.

러셀은 영국 웨일스의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를 일찍 여의어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경제적으로는 풍족했으나 삶의 무의미함 때문에 자살 충동에 시달리곤 했다. 그런 소년에게 수학은 ‘구원의 빛’이었다. 11살 때 형에게서 기하학을 배웠던 순간을 “첫사랑처럼 짜릿했다”고 훗날 회상했다.

러셀은 영국 최고의 명문인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과 도덕철학을 공부하고 31살 때인 1903년 홀로 ‘수학의 원리들’을 출간했다. 이후 10년 동안 방대한 수학 연구에 매달린 끝에 1910년부터 1913년까지 그의 스승인 앨프리드 화이트헤드와 공동으로 3권짜리 대저 ‘수학 원리(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를 펴냈다.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찬 이 책은 지금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100명 미만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난해하다. 그럼에도 수학과 철학의 방향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아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트 칼리지의 논리학·수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개인이 쓴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저술 범위가 넓고 다양해

러셀은 1907년과 1911년 두 번이나 하원의회 진출을 시도했다가 시대에 앞선 소신 때문에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첫 선거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을 과감하게 주장했다가 유권자들의 반감을 샀고, 두 번째 선거에서는 자신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무신론자임을 숨기지 않아 또다시 낙선했다.

그의 지적 탐구는 나이 40을 넘기면서 철학으로 이어졌다. 출발점은 러셀 자신이 “내 생애 가장 자극적인 지적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술회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1911)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틈틈이 철학적 사색을 발전시켜 100쪽 분량의 ‘논리철학 논고’를 완성한 뒤 1918년 원고를 러셀에게 넘겼다. 러셀은 1921년 자신의 서문을 붙여 오늘날 영미 분석철학의 기념비적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는 ‘논리철학 논고’를 출간했다.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러셀의 신상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1차대전 때였다. 1916년 징병 거부단체에서 반전주의자와 함께 탈영병을 돕다가 벌금형을 선고받아 대학에서 쫓겨나고 1918년 1월 징병 거부단체에서 발행하는 ‘트리뷰널’지에 레닌과 볼셰비키를 찬양하고 미군을 악의적으로 비판하는 논설을 썼다가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1920년 5월 소련에서 레닌과 스탈린 등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그들의 파벌성과 잔인함이 내 피를 꽁꽁 얼린다”며 볼셰비즘과는 결별했다.

1차대전 후 러셀은 관심 분야를 정치·사회·교육 분야로 확장했다. ‘중국의 문제’(1922),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1927), ‘결혼과 도덕’(1929) 등이 이 시기에 씌였다. 그런데 ‘결혼과 도덕’은 그를 부도덕하고 음탕한 호색한으로 낙인찍게 해 예정된 뉴욕시립대에 교수로 부임도 하기 전에 면직되는 데 영향을 줬다.

 

저항 기질은 가문의 내력과 무관하지 않아

2차대전 때는 나치즘에 대한 증오가 너무 커 반전운동은커녕 연합군을 지지했다. 그에게 2차대전은 ‘정의를 위한 투쟁’이었다. 종전 후에는 소련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미국이 즉각 대소(對蘇)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소련에 대해서도 강경했다. 1946년 1,000쪽에 달하는 ‘서양 철학사’의 출간으로 철학자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1950년 그동안 써온 각종 에세이와 대중 저서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러셀은 평생 1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썼는데 한 개인이 쓴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범위가 넓고 다양했다. 수학과 철학은 물론 중국, 두뇌, 결혼, 행복, 무신론, 전쟁범죄 등에 대해서도 썼고 심지어 립스틱 사용, 여행객 매너, 시거 고르는 법, 아내 구타 등 상상가능한 모든 주제에 대해서도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다. 95세이던 1967년에는 솔직하고 흥미진진하고 화려한 문체로 손꼽히는 3권의 ‘자서전’을 쓰기 시작해 1969년에 출간했다.

러셀은 특히 반전·반핵운동에 열심이었다. 러셀이 본격적으로 반핵운동에 뛰어든 것은 그의 나이 82세였던 1954년 미국의 비키니 핵실험 후였다. 1961년 반핵운동의 일환으로 시민 불복종운동을 주도하다가 89세의 나이에도 1주일 동안 유치장에 갇히고 1962년 쿠바 위기 때는 케네디와 흐루쇼프에게 자제를 호소하는 편지를 썼다. 90이 넘은 나이에도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때는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맹렬히 공격하며 세계의 양심을 모았다. 이름하여 ‘러셀 민간 법정’이다. 그는 이 법정을 통해 베트남전쟁에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전범 딱지를 붙였다.

그의 저항 기질은 가문의 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조상 중 윌리엄 러셀 경은 찰스 2세에 대항하는 모반에 가담했다가 교수대에서 생을 마쳤고, 총리를 두 번이나 역임한 할아버지 존 러셀 경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선거제도의 개혁을 위해 싸웠다. 할머니는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맞섰고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었던 여성의 참정권과, 당시로서는 차마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피임 허용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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