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물리학의 창시자’이면서 ‘20세기 현대물리학의 시발점’
아이작 뉴턴이 17세기에 파종한 이른바 고전역학은 200여 년 동안 근대 서구 세계관의 표준이었다. 모든 자연현상은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현재 상태를 정확히만 알면 수학을 통해 미래를 완벽하게 예상하고 그려낼 수 있다는 뉴턴의 결정론적 믿음은 사실상 불변의 진리였다.
그러던 중 19세기에 제임스 맥스웰(1831~1879)이 전자기학을 제기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뉴턴의 역학으로는 전자기학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뉴턴의 역학 법칙 외에 맥스웰의 방정식이 따로 필요했다. 물리학자들은 뉴턴의 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물리학의 양대 기둥으로 삼아야 고전물리학이 완성될 것으로 생각했다.
복병은 또 있었다. 18세기 증기기관의 등장으로 부상한 열역학이었다. 열역학은 역학이나 전자기학의 체계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열역학 중에서도 일반적인 이론을 찾는 게 쉽지 않은 흑체복사가 특히 골칫거리였다. ‘복사’는 물체를 가열하면 전자기파가 방출되는 현상을 뜻하고 ‘흑체’는 모든 종류의 빛에너지를 가리지 않고 흡수했다가 독특한 형태로 복사하는 특성이 있다.
흑체복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도자기공 토머스 웨지우드였다. 그는 도자기의 원료를 불가마 속에서 구울 때 온도가 높아지면 재료의 색깔이 붉은색에서 노란색, 흰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원리를 이용하면 물체의 색깔에서 대략적인 온도를 유추할 수 있고 반대로 물체의 온도를 통해 외관상의 색을 추정할 수 있게 된다. 1859년 독일의 물리학자 구스타프 키르히호프가 최초로 흑체복사를 설명하는 ‘키르히호프 법칙’을 발표했다. 하지만 온도와 파장의 범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면 키르히호프의 법칙이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물리학자들은 흑체복사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공식 완성에 몰두했다. 그중에는 독일 베를린대 교수 막스 플랑크(1858~1947)도 있었다.
플랑크가 흑체복사를 연구하고 있던 1896년 그의 연구를 자극하는 다른 물리학자의 새로운 실험 성과가 발표되었다. 독일 제국물리기술연구소 연구원 빌헬름 빈이 전등을 개발하기 위한 필라멘트 스펙트럼을 연구하던 중 새로운 복사 공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플랑크는 고전물리학과 열역학 기본법칙에서 빈의 공식을 이론적으로 유도하기 위해 1897년부터 3년 동안 이 작업에만 몰두했다. 1899년 5월에는 전자기학과 열역학 제2법칙을 토대로 빈의 공식을 일반적인 형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제국물리기술연구소의 다른 연구원들이 높은 온도의 긴 파장에서는 빈의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는 빈의 공식을 이론적으로 유도한 플랑크의 일반 공식도 틀렸다는 의미가 된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불연속적인 에너지 개념 등장
플랑크는 1900년 3월 빈의 공식이 짧은 파장에서만 성립하는 공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볼츠만의 통계역학을 빌어 새로운 복사 법칙을 만드는 데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고전물리학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불연속적인 에너지 개념을 등장시켰다. 자신의 복사 공식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당시 물리학의 관점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연속적인 고전전자기학과 불연속적인 통계역학을 절충한 것이다.
플랑크는 1900년 12월 14일 독일물리학회에서 ‘E(에너지)=hν’ 즉 원자 수준에서 물질은 진동수(v)와 ‘플랑크 상수’(h)라는 특정한 상수를 곱한 정수 배만큼의 에너지를 갖는다는 이른바 ‘양자가설’을 발표했다. 양자가설에 따르면 빛에너지는 종전에 생각해온 것처럼 연속적인 하나의 흐름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불연속적인 물리량, 즉 ‘양자’라고 하는 독립적이고 분리된 ‘다발’로 전파된다. 거시세계에서는 이 불연속성이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은 양이라 뉴턴 역학이 유효했지만 전자 등 소립자 같은 미시세계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변수가 된다.
따라서 플랑크의 양자가설을 토대로 향후 20~30년 동안 완성될 ‘양자역학’은 비록 우리가 삼라만상의 현재 상태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하더라도, 미래는 오직 확률적 예측만이 가능하게 되므로 미래를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것은 고전역학이 그토록 자신하던 결정론적 사고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그러나 플랑크는 자신이 제시한 ‘플랑크 상수’가 미시세계의 물질 운동법칙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양자역학’의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될 거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후배 학자들의 계속된 연구 덕에 양자가설이 양자역학으로 발전하면서 플랑크는 ‘현대물리학의 창시자’로 불리게 되었고 그의 논문은 ‘20세기 현대물리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았다.
양자가설,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사고에 대한 전면 부정
양자역학은 20세기 초반 각국의 물리학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구에 뛰어들면서 더욱 완성된 형태로 발전했다. 1911년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금박막에 쏘인 알파 입자(헬륨의 원자핵) 중 일부가 도로 튀어나오거나 산란하는 실험 결과에 주목했다. 이는 알파 입자가 양전기를 띠고 있으므로 금 원자 어딘가에 역시 양전기를 띤 부분이 있어서 전기력 때문에 밀려났다고 볼 수 있는 문제였다. 생각을 확장하면 금 원자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고르게 섞여 있는 중성이 아니라 원자 한가운데에 양전기만 지닌 부분이 따로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러더퍼드는 이 양전기를 띤 부분을 원자핵이라고 칭하고,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도는 일종의 작은 태양계 같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에도 모순은 있었다. 기존 물리학에 따르면 (-)전하를 띤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며 원운동을 할 경우 전자는 에너지를 잃게 되어 결국 (+)전하를 띤 원자핵으로 떨어져 원자의 안정 상태가 깨져야 하는데도 원자가 계속 안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모순이었다.
이 문제에 도전한 이가 러더퍼드의 제자였던 덴마크의 닐스 보어였다. ‘필로소피컬 매거진’ 1913년 7월호에 실린 보어의 논문에 따르면, 원자핵 주위의 궤도를 도는 전자들이 다른 궤도로 이동할 때는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하는 데 이 값은 띄엄띄엄 불연속적인 물리량을 뜻하는 양자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보어는 이후에도 양자역학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동이면서 입자인 빛의 이중적 성질 밝혀져
다른 관점에서, 양자론 발전의 초기 20년을 짓누른 가장 근본적인 위협은 빛의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개념이었다. 파동과 입자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빛이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은 기존 물리학의 논리로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빛은 어떤 실험에서는 파동처럼 보이고 어떤 실험에서는 입자처럼 보였다. 이 수수께끼에 도전한 대표적인 물리학자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1905년 플랑크 공식을 통해서 파동이면서 입자인 빛의 이중적 성질을 밝혀냈다.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어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연구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둔 연구자는 프랑스의 물리학자 루이 드 브로이였다. 그의 연구에 따라 각국의 연구자들은 관찰 방식에 따라 빛이 입자 또는 파동으로 보인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드 브로이는 1924년 이를 이론화해 발표한 물질파 개념으로 양자역학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벽돌을 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뒤이어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카를 하이젠베르크가 1925년 양자역학 방정식의 근간이 되는 행렬역학을 창안하고 1927년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함으로써 양자역학은 비로소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에르빈 슈뢰딩거는 1926년 행렬역학과는 전혀 다른 파동방정식을 세워 양자역학의 골격을 더욱 단단히 하는 데 기여했다. 그 후에도 막스 보른, 볼프강 파울리, 폴 디랙 등이 양자역학 완성에 기여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더불어 양자역학의 탄생을 주저 없이 20세기 최대 과학적 성취로 꼽는다.
고전역학은 결국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의해 상당부분 폐기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인류가 만든 가장 완성도 높은 과학 이론의 전형을 꼽으라면 고전역학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과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을 꼽을 때도 뉴턴은 아인슈타인에 뒤지지 않는다. 실제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필요한 극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뉴턴의 이론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