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강의는 당시 베를린의 엄청난 지적 사건
사회학을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정착시킨 사회학의 창시자들로는 독일의 게오르크 지멜(1858~1918), 막스 베버(1864~1920), 프랑스의 에밀 뒤르켐(1858~1917)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베버와 뒤르켐이 생전에 학계에서 각광을 받은 것과 달리 지멜은 학계에서 주변인으로 살다가 제자도 없이 생을 마쳤다. 생전에 학문적으로 불운했던 지멜이 재발견된 것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학계의 화두로 부각되고 거대 담론보다 일상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 강조되기 시작한 1980년대 들어서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식사회를 강타할 때, 지멜이 과거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모더니티(근대성)의 문제를 연구했던 사람으로 뒤늦게 알려지면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지멜은 독일 제국의 수도이자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인 베를린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는 유대계였으나 아버지는 가톨릭으로, 어머니는 개신교로 일찍이 개종했다. 지멜은 어머니를 따라 개신교 세례를 받았다. 16세가 되던 해인 187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가족과 가깝게 지내던 음악 출판업자가 지멜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그는 나중에 지멜을 입양했다. 후견인이 1882년 세상을 떠나면서 막대한 유산을 남겨 지멜도 그 일부를 상속받았다. 덕분에 지멜은 계속되는 학문적 불운에도 학계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지멜은 1876년 베를린대에 입학해 철학, 역사학, 심리학, 예술사 등을 두루 공부하고 1881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884년 대학교수 자격 취득 심사를 통과해 학자로서의 자격을 갖췄으나 정식교수는 되지 못하고 30년 동안 사강사와 원외 교수로 떠돌았다. 사강사는 전임 교수와 달리 수강하는 학생들의 수강료에 의존하는 비정규직이었다. 지멜은 1885년 1월 모교인 베를린대에서 철학과 사강사 자리를 얻어 강의를 시작했다.
시대를 관통하고 설득력을 갖춘 그의 강의는 신문에 예고 기사가 실리고 한때는 수강생이 1,000여 명이나 될 정도로 당시 베를린의 엄청난 지적 사건이었다. 학생뿐 아니라 에른스트 블로흐, 죄르지 루카치, 알베르트 슈바이처 같은 지식인들도 지멜의 강의를 듣고 교양을 얻으려는 부인들까지 매료시켰다. 그런데도 그는 전임 교수가 되지 못하고 계속 사강사에 머물렀다. 1901년 원외 교수로 승진했지만 이것 역시 보수와 발언권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이런 그에게 1908년 정교수 기회가 찾아왔다. 학자로 교수로 승승장구한 막스 베버가 지멜의 학문적 성과를 높이 사 하이델베르크대 정교수로 추천한 것이다. 그러나 지멜은 학교 측의 반대에 부닥쳐 정교수로 채용되지 못했다. 지멜은 1914년에야 프랑스와의 국경에 위치한 슈트라스부르크대 철학·사회학의 정교수가 되는 기쁨을 맛보았으나 그것도 잠시뿐 그해 발발한 1차대전으로 강의 한번 제대로 못하고 1918년 생애를 마쳤다. 지멜은 평생을 강사로 떠돌면서도 많은 저작과 논문을 남겼다. 평생 31권의 책과 256편의 글을 정신적 유산으로 남겼다.
돈의 이중적 성격 예리하게 통찰
지멜은 1889년 5월 한 세미나에서 돈의 심리학에 대해 발표하고 그 내용을 한 저널에 게재했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돈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이 모든 걸 통합해 1900년 간행한 책이 ‘돈의 철학’이다. 지멜은 ‘돈의 철학’에서 돈과 개인, 사회와 문화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심층적으로 논구했다. 그는 ‘돈의 철학’에서 돈이 지닌 양적·질적 가치를 간파함으로써 돈을 철학적으로 고찰한 거의 최초의 사회학자이자 돈의 이중적 성격을 통찰한 사상가가 되었다.
‘돈의 철학’에 따르면 중세에는 소유물과 소유자가 구분되지 않아 경제적 행위는 인격성을 띠었다. 그러다가 근대사회로 접어들자 소유자와 소유물이라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다른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각기 다양한 이합집산과 분화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가 화폐경제의 도입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 지멜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화폐경제가 진행될수록 인간의 자유는 증대되지만 그럴수록 개인은 화폐경제의 비인간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즉 돈이 인간을 전근대적 집단에서 해방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전체사회 속에서 고립시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돈은 현대인의 사회적 삶과 문화적 삶의 물적·경제적 토대가 된다. 돈이 지닌 양적 논리는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서 질적 논리로 비약한다. 돈의 전형적인 논리인 탈개성화와 탈인격화로부터 해방되어 개성과 인격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역설적이지만 돈의 소유에 의해 주어진다. 즉 돈을 소유한 개인은 사회적·문화적인 것과 개인적·주관적 삶에 관심을 갖고 이를 발전시키게 되는 것이다. 결국 돈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특징과 더불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지멜은 ‘돈의 철학’ 서문에서 사적유물론을 보강하는 것이 책의 방법론적 의도라고 밝혔다. 지멜이 보기에 마르크스가 구축한 이론 체계는 인간의 역사와 사회를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잡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광범위한 인간의 문화적 삶에 대한 하나의 부분상을 제공해 줄 뿐이다. 따라서 지멜은 마르크스의 위대한 지적 유산을 보완·심화·완성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는 돈을 논하면서 경제학을 동원하지 않았다. 서문에서도 “이 책의 단 한 줄에서도 나는 경제학적 논의를 의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지멜의 사회학적 연구를 집대성한 ‘사회학’(1908)은 지멜의 형식사회학의 전모를 보여주는 782쪽의 대작이다.
이런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지멜이 학계로부터 냉대를 받고 외곽을 맴돌았던 이유는 복합적이다.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당시 독일 지식사회에 팽배해 있는 반유대주의이고, 다음은 지멜의 업적과 명성 그리고 아카데미 세계의 안팎에서 누리는 인기에 대한 동료 학자들의 시샘과 질투다. ‘관심의 광범위함’도 냉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지멜의 관심사는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는 극도로 분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언어로 전달하기 위해 사회학 말고도 경제·정치·과학·종교·예술 등 거시적인 사회 체계들에서부터 모험·교태·성·유행·사랑·매춘·가난 같은 미시적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식 형식과 범주들을 자유자재로 동원했다. 따라서 사소하고 일시적 현상을 다루는 그의 방법론이 다른 사회학자들에게는 단편적이고 비체계적으로 보였을 것이고, 이런 이유 때문에 다른 학자들로부터 “온갖 분야에 관심을 분산시키는 잡문가”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