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가요계의 거성’ 남인수 탄생 100주년

남인수(1918~1962)는 타고난 미성, 세 옥타브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발성, 폭발적이고 정열적인 창법으로 당대를 풍미한 ‘서정가요의 황제’이자 ‘가요계의 거성’이었다. ‘일본 엔카의 대부’ 고가 마사오가 남인수를 가리켜 “일본에서는 이런 가수가 왜 나오지 않는지 통한할 노릇”이라고 자조할 정도로 그는 일제 하 한국인의 자랑이었다.

남인수는 일제 하에서는 유랑과 향수, 청춘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고 해방 후에는 전쟁과 분단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서민들의 상처를 노래로 위무했다. 이렇게 부른 노래가 어림잡아 1,000곡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인수가 이런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은 어려서 혹독한 가난을 겪고 타국 땅에서 소년 노동자로 갖은 천대와 멸시를 겪은 체험이 삶과 노래에 육화되었기 때문이다.

남인수를 들으며 자란 고은은 시집 ‘만인보’에서 남인수를 ‘반도(半島)의 목소리’라고 헌사하고, 시인 이동순은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카랑카랑하지만 애수와 정감으로 둘러싸인 목소리가 핵심’이라고 했다. 소설가 김훈은 남인수 노래에서 영감을 얻어 단편 ‘고향의 그림자’를 썼다.

남인수가 1918년 10월18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날 때의 이름은 최창수였다. 하지만 어려서 부친을 잃고 모친이 강씨 성을 가진 남자에게 재가하면서 강문수가 되었다. 지독한 가난과 구박이 싫어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전구공장과 제철공장 등을 전전했다. 중노동을 하는 중에도 일본 가수들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따라 불러 주변 노동자들로부터 ‘가수’로 불렸다. 그는 노래도 잘했지만 하모니카를 불고 장구와 북을 치는 솜씨도 걸출했다.

강문수가 진짜 가수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 시에론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린 것은 17살이던 1935년 5월이었다. 당시 시에론레코드사의 문예부장은 극작가 겸 작사가 박영호였다. 그는 강문수의 자질을 금세 알아보고 작곡가 박시춘에게 소개했다. 박시춘은 강문수가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가수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작곡한 ‘눈물의 해협’을 가르쳐 1936년 7월 음반을 취입하게 했다. 그러나 대중은 망향의 한을 담은 강문수의 데뷔곡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노래 덕에 작사가 강사랑의 눈에 든 것은 생각치 못한 수확이었다. 강문수는 강사랑의 후원을 받아 메이저 레코드사인 OK레코드로 소속을 바꾸고 남인수라는 예명으로 1936년 10월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손목인 작곡) 등을 취입했다. 하지만 이 노래 역시 참패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가수가 왜 나오지 않는지 통한할 노릇”

박시춘은 ‘눈물의 해협’이 실패한 후 작곡에서 손을 떼고 악극단 ‘낭랑좌’의 밴드 마스터로 전국을 유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OK레코드로부터 연락이 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박시춘은 ‘눈물의 해협’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곡은 그대로 살리되 가사는 이부풍에게 구슬픈 내용으로 다시 쓰게 해 ‘애수의 소야곡’을 완성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으로 시작하는 ‘애수의 소야곡’은 1937년 12월 남인수의 목소리에 실려 발표되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음반 판매점에서는 가게 앞에 유성기를 내다 놓고 남인수의 노래를 틀고 또 틀었다.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 덕에 남인수는 같은 OK레코드사 소속 이난영과 함께 가요계 최고 스타로 급부상하고 이후 30년 동안 전성기를 구가할 박시춘·남인수 콤비의 문을 열었다. ‘애수의 소야곡’은 ‘애수의 세레나데’라는 제목의 일본어로도 출반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남인수는 일제 하에서 ‘꼬집힌 풋사랑’, ‘낙화유수’ 등 800여 곡을 부른 뒤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전에 앓기 시작한 폐병은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다. 폐병은 그를 ‘돈인수’로 불리도록 했다. 폐병으로 쓰러질 때를 대비해 인색하게 살다보니 붙은 별명이었다. 해방 후 38선이 굳어질 무렵인 1947년 9월, 남인수는 ‘아~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로 시작하는 ‘가거라 삼팔선’(작사 이부풍, 작곡 박시춘)을 취입해 또다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노래는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대중에게 처절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던 중 요절

휴전 후 남인수는 피란지 수도의 고단함을 뒤로 하고 부산역을 떠나는 심정을 노래한,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로 시작하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발표해 명불허전 가수임을 증명해 보였다. 호동아가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한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유니버셜레코드를 통해 1954년 8월 발표되었다. 전후 어수선한 분위기와 피폐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 노래는 놀랍게도 10만 장이 넘게 팔려 남인수에게 제2기 전성기를 안겨주었다. 또한 1980년대까지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영남, 심수봉, 김연자, 은방울자매, 윤수일, 들고양이들, 박일남, 손인호 등 무수한 가수에 의해 무수하게 리메이크되었다.

남인수는 폐병을 앓으면서도 ‘추억의 소야곡’(1955), ‘무너진 사랑탑’(1960) 등의 히트곡을 부르며 인기를 이어갔다. 당시 가요계는 또 다른 스타 현인이 있었다. 두 사람이 가요계의 양대산맥을 이루자 두 가수를 한 무대에 올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빗발치는 팬들의 요구에 밀려 1959년 두 사람은 한 무대에 섰다.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 등지에서 화려한 경연이 펼쳐졌다.

그 무렵 남인수는,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전쟁 후엔 세 딸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를 미국으로 떠나보내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는 가수 이난영을 물심양면으로 돕다가 연인이 되었다. 폐병을 앓고 있는 그를 위해 이난영이 헌신적으로 간호했으나 1962년 6월 26일 결국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는 가요계 최초의 연예협회장으로 엄수되었다.

남인수는 이처럼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다 요절했으나 수십 년 후 불거진 친일가요 논란에 휩싸여 명예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일제시대 말기 발표한 ‘감격시대’(1939), ‘강남의 나팔수’(1942), ‘남쪽의 달밤’(1942), ‘혈서지원’(1943) 등이 친일가요라는 사실이 밝혀져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오른 것이다. 경남 진주의 ‘남인수 가요제’ 명칭도 일부 단체의 압력에 밀려 ‘진주가요제’로 바뀌었다.

박시춘이 작곡하고 남인수가 부른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으로 시작하는 ‘감격시대’는 친일가요인 데도 한동안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광복절 때마다 방송국이 ‘감격시대’를 방송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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