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차범근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 독일에서 활동한 역대 외국인 선수로는 최다골(98골) 기록

↑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할 때의 차범근

 

역대 외국인 선수로는 분데스리가 최다골 기록

차범근(1953~ )은 경기도 화성의 가난한 소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또래보다 유달리 키가 컸던 그의 주특기는 달리기였다. 서울의 경신고 축구선수로 뛸 무렵, 키가 178㎝로 커지고 준족으로 성장해 고교 졸업을 앞둔 1972년 초 청소년대표선수로 선발되었다. 차범근이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 것은 고려대 1학년이던 1972년 4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였다. 차범근의 종횡무진 활약으로 한국청소년팀은 결승까지 진출했다. 비록 0-1로 이스라엘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차범근은 한국 축구의 기대주로 국민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차범근은 1972년 7월의 메르데카배 축구대회 때 사상 최연소인 19세의 나이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국가대표 선수로 첫 출전한 메르데카배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차범근은 결승골을 넣어 한국이 말레이시아를 2-0으로 누르고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한국 축구는 동남아대회에서 자주 우승을 차지하는 이른바 ‘70년대 전성기’를 맞았다. 차범근은 이 전성기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차범근의 실력이 여실히 입증된 사례가 1976년 9월 11일 제6회 대통령배대회에서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이었다. 말레이시아는 한국보다 실력이 특별히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날은 운이 좋아 경기 종료 5분을 앞두고 한국을 4-1로 앞서나갔다. 차범근은 사실상 패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그라운드를 누벼 5분 동안 혼자서 3골을 터뜨리며 기염을 토했다. 이 극적인 무승부를 발판으로 한국은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날의 ‘사건’은 축구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한국의 축구 수준은 여전히 아시아에서 최고가 아니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출전을 위한 아시아 예선전을 통과하지 못하고 항상 문턱에서 좌절했다. 차범근도 독일 월드컵 예선(1974년), 몬트리올 올림픽 예선(1976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예선(1978년)에 모두 출전했으나 번번이 본선 티켓을 놓쳐 분루를 삼켰다. 사실 당시 차범근의 기술은 단조로웠다. 드리블 기술은 세련미가 부족했고, 상대 수비 뒤로 볼을 차놓고 스피드로 경쟁하는 기술 하나로는 한계가 있었다.

차범근은 1976년 10월 공군에 입대했다. 당시 공군의 복무기간은 35개월이고 육군은 30개월이었으나 공군이 제대를 8개월 앞당겨주겠다고 해 차범근은 공군에 입대했다. 차범근이 공군 소속 축구선수로 활약하고 있던 1978년 독일의 분데스리가가 그에게 손짓을 했다. 분데스리가는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뛰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였다. 그러나 197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을 앞둔 축구협회는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가는 것을 조건으로 출국을 허락하자 차범근은 아시안게임에서 조국에 우승(북한과 공동우승)을 안긴 뒤 방콕에서 바로 독일로 날아가 12월 25일 분데스리가 최하위팀인 ‘SV다름슈타트’에 입단하고 곧이어 데뷔전을 치렀다. 차범근은 데뷔전에서 2골을 도우며 3-1 승리에 기여해 독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나 정부가 27개월의 군 복무 기간이 형평성에서 어긋난다고 해 차범근은 데뷔전 한 경기만 치르고 다시 돌아와 나머지 복무기간을 채웠다.

이 때문에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이 취소되어 차범근은 다시 독일로 건너가 1979년 7월 16일 프랑크푸르트 팀에 입단했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를 흥분케 한 사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차범근은 그러나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그러자 반신반의하던 국민들도 열광하기 시작했다.

 

독일 팬들 ‘갈색 폭격기’로 부르며 열광

차범근은 데뷔 첫해인 1979~1980 시즌 거의 전 경기(31 경기) 출전에 12골을 기록, 득점랭킹 7위에 오르는 기적적인 성적을 냈다. 팀이 그해 전통의 UEFA(유럽축구연맹)컵 대회에서 우승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독일인들은 차범근을 ‘갈색 폭격기’, ‘한국산 호랑이’라고 부르며 열광하기 시작했다. 첫 시즌에 차범근의 주특기인 빠른 돌파를 몰라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독일 선수들은 80~81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날을 세운 태클로 차범근을 압박했다. 차범근은 결국 상대 선수의 고의적인 파울로 척추뼈를 크게 다쳤다. 한 달 이상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나 출전했는데도 시즌 8골을 기록해 재기에 성공했다. 82-83 시즌이 끝나고 차범근은 레버쿠젠으로 이적했다. 83-84 시즌엔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뒤 처음으로 큰 부상없이 전 경기(34 경기)에 출장했고 85-86 시즌엔 17골로 득점랭킹 4위에 오르는 등 최고조의 경기를 펼쳤다.

차범근은 “차붐”으로 불렸다. 프랑스 ‘풋볼’지는 차범근을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선수”라고 지목했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지’는 차범근을 영국의 대처 총리와 함께 ‘80년대의 4대 상승세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분데스리가 진출 후 스태미너 식사를 고집한 차범근의 키가 2㎝ 정도 더 커지고 체격도 유럽 선수들의 체격과 비슷해졌다는 사실이었다.

1986년 한국 축구팀이 마침내 멕시코 월드컵 출전 자격을 따낸 덕에 차범근도 8년 만에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에 출전했다. 공격의 활로를 열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골은 넣지 못했다. 차범근은 88~89 시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만년 하위에 맴돌던 레버쿠젠을 분데스리가의 강호로 탈바꿈시키고 UEFA(유럽축구연맹)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이 대회 결승에서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린 세 번째 골을 터뜨려 수훈갑이 되었다.

88~89 시즌을 마치고 은퇴를 선언했을 때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통산기록은 11년간 308 게임 출장에 98 골이었다. 독일에서 활동한 역대 외국인 선수로는 최다골이었다. 또한 197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대표 A매치에서 넣은 58골(136 경기)은 2023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역대 최다골로 기록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현대축구 특성 상, 차범근의 A매치 최다골(58골)이 깨질 확률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차범근은 1990년부터 4년 동안 프로축구 현대팀을 이끌었으나 팀을 우승시키지는 못했다. 1997년 1월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되어 1998년 6월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으나 멕시코전 역전패에 이어 네덜란드에 0-5라는 치욕적인 스코어로 완패하는 바람에 월드컵 기간 도중 경질되는 수모를 당했다. 2003년 11월부터 수원 삼성팀의 감독직을 맡아 2010년 6월까지 활동하다 이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 방송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차범근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차범근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세운 98골 기록은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의 손흥민이 2020년 10월 5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벌인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함으로써 깨졌다. 손흥민은 이날의 기록으로 유럽의 4대 빅리그(잉글랜드·스페인·이탈리아·독일) 1부리그에서 통산 100골을 채워 차범근의 기록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했다. 손흥민의 기록은 계속 경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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