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KBS TV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한 장면

 

그날 밤 전국은 눈물바다 이뤄

  “그것은 통곡이었다. 기쁨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수만 개의 바늘과 칼끝이 가슴을 갈기갈기 저미는 아픔이었다.”(1983.7.3. 조선일보 사설) KBS가 6·25 특집의 일환으로 기획한 ‘지금도 이런 아픔이-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생방송으로 전국의 시청자를 찾아간 것은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이었다. 방송 후 무심코 ‘이산가족…’을 보던 시청자들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출연자들이 가족을 만날 때는 마치 내 일처럼 함께 기뻐하며 밤잠을 설쳤다. 가수 패티김이 노래한 배경음악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까지 시청자의 심금을 울리면서 전국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날 밤 TV를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은 한민족이 아니었다.

‘이산가족…’은 우연한 계기로 만들어졌다. 6월 21일 KBS는 아침 프로그램 ‘스튜디오 830’에서 9명의 이산가족을 출연시켜 ‘아직도 내 형제를 못 찾았소’를 방송했다. 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인터뷰해 방송했지만 9명 중 1명도 가족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방송 끝 부분에서 한 남자가 울음을 터뜨리자 시청자와 이산가족들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제작진의 머릿속에 이산가족을 위한 특별 생방송이 성공을 거둘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떠올랐다.

KBS는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6월 30일 밤 시간에 편성한 뒤 6월 28일부터 출연 신청을 받았다. 안국정·이원군 PD, 유철종·이지연 MC로 꾸려진 제작진은 성공 여부를 자신하지 못해 당사자들 모르게 10가족 이상의 상봉 케이스를 사전에 준비했다. 방송 시작 전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에는 1000명이 넘게 몰려와 피맺힌 한을 털어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 10시 15분 생방송이 시작되고 첫 번째 이산가족이 등장했으나 상봉 결과 이산가족이 아니었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실패해 제작진 얼굴에 당혹감이 역력한 가운데 다행히 첫 상봉이 이뤄졌다. 40살의 한 여성이 1·4 후퇴 때 헤어진 사촌남매 7명을 한꺼번에 만난 것이다. 이후 중앙홀에 설치된 접수대에는 늦은 밤인데도 신청이 쇄도했다. 밤 11시쯤 벌써 중앙홀이 거의 꽉 차버렸다. 밤 11시 50분까지 1시간 35분 동안 방송하려던 당초 기획은 긴급 대책회의를 통해 이튿날 새벽 2시 25분까지 연장되었다. 그사이 몰려든 신청자는 2000여 명에 달했고 4시간 10분의 방송 동안 850쌍의 가족이 출연해 36쌍이 극적으로 가족을 상봉했다.

 

20시간 넘게 생방송 진행은 방송 사상 전무후무

7월 1일 밤 10시 15분 다시 시작된 ‘이산가족…’은 꼬박 밤을 새우고, 또 낮을 거쳐 7월 2일 밤 저녁 뉴스가 나가는 7시 30분에 일시 중단할 때까지 무려 20시간 넘게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방송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제작진과 사회자들도 체력의 한계에 다다랐지만 이산가족의 체력도 걱정이었다. 이산가족이 대부분 노인이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가족을 찾을 때까지 안 가겠다”며 KBS를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설득해도 돌아가질 않아 “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의견이 안팎에서 나오면서 적십자사와 여의도 성모병원 등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현장 파견을 나왔고, 철야 중인 이산가족에게는 음식과 담요를 제공했다. 그 사이 8000여 명 이산가족의 이름이 전국에 메아리쳤고 감격적으로 해후한 사람만도 300쌍이 넘었다. 그날부터 방송은 방송사의 것이 아니었다. 눈물과 한으로 수십 년을 지내온 이 땅 이산가족들의 것이었다.

첫 방송 시작과 함께 한맺힌 사람들의 행렬이 KBS가 있는 여의도를 뒤덮었다. KBS는 뉴스 등 주요 프로그램 외에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찾기’라는 단일 주제로만 5일 동안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했다. 방송 6일째 4만 3000여 명이 신청하고 1101쌍의 가족이 재회의 눈물을 흘렸다. 지척이면 닿을 거리에서 30년을 떨어져 살던 모자가 극적인 상봉을 했다. 전쟁 통에 홀로 버려져 고아원을 전전했던 40대 중년 남성이 애타게 찾던 형님 품에 안겨 목 놓아 울었다. 흐트러진 몸짓과 자지러지는 절규에 사회자도 시청자도 함께 울며 밤을 새웠다.

KBS 본관 주변은 구름처럼 몰려든 이산가족들이 쏟아내는 비원의 광장으로 변했다. 방송사가 있는 여의도 일대는 온통 벽보 천지였다. 그것도 모자라 여의도광장의 아스팔트 바닥에까지 벽보가 깔렸다. 마네킹을 들고 와 벽보를 붙여 시선을 끌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해가 뜨나 비가 오나 망부석처럼 벽보 곁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도 두 번이나 현장을 방문해 담당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총리 등 각료를 비롯 100여 명에 달하는 국내외 고위급 인사들도 현장을 참관했다. 초반 시청률은 전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에 힘입어 80%가 넘을 때도 있었다.

 

장엄한 인간 드라마이자 한 편의 대서사시

  세계 100여 개 언론이 이 비극적이고 감동적인 드라마를 ‘텔레톤’(텔레비전의 마라톤 방송)이라 부르며 밀착 보도했다. 세계 10여 개국 25개 방송사가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카메라에 담아 자국에 보도했고 전 세계 42개국이 하이라이트 장면을 방영했다. 이산가족찾기의 또 다른 화제는 음악이었다. 패티김이 노래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방송 내내 배경음악으로 깔린 가운데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상황과 구슬픈 음악들이 절묘하게 분위기가 맞아떨어져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초기에는 음악감독이었던 이재석 감독이 6~7곡의 노래를 가져왔고 가수 김수희, 김연자, 김정구 등이 출연했다. 이미자는 ‘북쪽에 보내는 편지’를 불러 아픔을 함께 나눴다. 무명가수 설운도는 7월 6일 방송에 나와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은 노래 발표 후 최단 기간에 히트곡이 된 사실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아나운서 김동건·신은경·황인용과 탤런트 강부자 등이 진행자로 합세해 잠도 잊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 전쟁 통에 헤어진 이산가족의 사연을 소개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사건도 생겼다. 여동생을 찾던 한 여성에게 사회자가 “어떻게 헤어졌냐”고 묻자 “피란길에 사람들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미군이 내 여동생을 쐈다”고 답한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사회 분위기로는 방송에 나갈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사회자였던 김동건 아나운서가 놀라며 “기억이 확실하냐”고 묻자 이 여성은 “기억이 확실하다, 미군이 맞다”고 반복했고 이 내용이 모두 방송으로 나갔다.

‘이산가족…’은 138일 동안 453시간 45분이나 계속 방송되다가 11월 14일 새벽 4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기간 총 10만 952명의 이산가족이 출연을 신청했고 이 가운데 5만 3536명이 출연해 1만 189명이 그리던 가족을 찾았다. ‘이산가족…’은 1983년 제6차 세계언론인대회에서 ‘그해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되고 1984년 세계평화협력회의 총회에서 세계 방송사상 처음으로 ‘골드 머큐리애드로 서램상’을 수상했다.

단일 프로그램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진행된 생방송으로 기네스북에도 오르고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기록물은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11월 14일 새벽 4시까지 방송기간 138일, 방송시간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한 비디오 녹화원본 테이프 463개와 담당 프로듀서 업무수첩, 이산가족이 직접 작성한 신청서, 일일 방송진행표, 큐시트, 기념음반, 사진 등 2만522건의 기록물을 총칭했다.

방송사적으로는 세계 방송사상 유례없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방송매체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한국 방송사의 새로운 이정표로 기록되었다. 수많은 이산가족에게는 재회의 기쁨을 안겨주었고,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젊은이에게는 전쟁의 비참함을 일깨워주었다. 국민에게는 민족적 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장엄한 인간 드라마였고 한 편의 대서사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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