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미 팬암기 폭발 사고’(1988년)의 전말과 카다피(리비아)·미국 간의 20년 전쟁

↑ 공중폭발 후 떨어진 팬암기 잔해

 

by 김지지

 

미 법무부가 1988년 270명의 사망자를 냈던  ‘팬암 103편 항공기 폭발 사건’ 용의자의 신병을 확보했다고 2022년 12월 11일 미 언론이 일제히 보도했다. 34년간 끈질기게 수사를 계속한 끝에 폭발에 사용된 폭탄을 운반한 리비아 정보요원을 찾아내 구금했다는 것이다. 마수드의 신병을 확보한 과정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미 언론은 그가 워싱턴DC 연방법원에서 재판받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른바 ‘로커비 사건’으로도 불리는 ‘팬암 103편 항공기 폭파 사건’에 대해 알아본다.

 

리비아 카다피와 미국의 20년 전쟁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1942~2011) 대위가 군사쿠데타에 성공해 전권을 장악한 것은 1969년 9월이었다. 카다피는 ‘아랍민족주의 기수’ 역할을 자임하면서 외교적으로는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를 표방했다. 공개 석상에서도 거리낌없이 미국과 서방의 대아랍 정책을 비난하고 서방국가들을 경원시했다. 이 때문에 아랍권에서는 인기가 높았으나 서방국가들은 ‘국제사회의 이단아’ ‘중동의 미친개’ 등으로 낙인찍었다.

카다피가 미국 등 서방세계와 본격적으로 틀어진 시기는 1980년대 중반이었다. 1985년 12월 17일 이탈리아 로마와 오스트리아 빈공항에서 무차별 총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16명(미국인 5명 포함)이 사망한 것이 시작이었다. 미국은 카다피를 배후로 지목, 1986년 1월 리비아와의 경제관계를 모두 끊었다. 카다피는 1986년 3월 리비아 북쪽 지중해의 시드라만에 외국 함정이나 항공기의 출입을 봉쇄하는 것으로 맞불을 놓았다. 미국이 아랑곳하지 않고 시드라만의 국제 해역에서 해군 작전을 펼치자 카다피는 자국 해역을 침범하는 모든 미국 항공기와 함정을 궤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도 미군기가 해역을 침범하면서 군사충돌이 일어나 미 항모에 접근하는 리비아 전투기가 격추되고 함정이 침몰했다.

이런 와중에 1986년 4월 5일 주로 미군이 출입하는 독일 서베를린의 디스코텍에서 폭탄테러가 발생, 미군 2명과 터키인 1명이 죽고 미군 50명을 포함해 230명이 다쳤다. 미국은 리비아를 배후로 지목하고 폭탄 테러 3일 전에 일어난 미국의 TWA 여객기 공중폭파 사건도 리비아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이 보복에 나선 것은 1986년 4월 15일 새벽 2시였다. 야음을 틈타 영국에서 이륙한 미 F-111 전폭기와 지중해 제6함대 항모에서 발진한 미 해군 전폭기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제2도시 벵가지 주변의 군사시설을 초토화했다. 폭격으로 카다피의 양녀를 포함해 37명이 죽고 카다피의 두 아들을 포함해 100여 명이 다쳤다. 하지만 카다피는 건재했다. 리비아도 보복에 나섰지만 미국의 F-111 전폭기 1기를 격추하고 이탈리아 내 미군 레이더 기지를 공격하는데 그쳤다.

 

‘미 팬암기 폭발 사건’의 전말

이런 가운데 리비아 폭격 후 2년 반이 지난 1988년 12월 21일 오후 7시 19분, 런던 히스로 공항을 출발해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가던 미 팬암기(보잉 747)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공중폭발했다. 이 사고로 259명의 탑승자(미국인 189명) 전원과 기체 잔해에 맞은 지역주민 11명 등 모두 270명이 사망했다. 사고기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해 영국의 런던을 경유한 뒤 미국의 뉴욕으로 가는 중이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보름 전, 핀란드 주재 미 대사관에 프랑크푸르트발 뉴욕행 팬암기를 폭파하겠다는 익명의 전화가 걸려왔으나 핀란드 정부와 팬암사는 늘상 있어온 협박 전화로 여기고 운행을 강행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사건은 ‘팬암기 폭발 사건’ ‘로커비 사건’으로 불렸다.

공중폭발한 팬암기가 떨어진 로커비 인근 마을 모습

 

당초 수사팀은 이란의 사주를 받은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 단체로 추정하고 수사를 벌였다. 그해 여름 걸프만에서 미 해군이 이란 여객기를 전투기로 오인해 격추한 것에 분노한 이란이 보복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수사팀은 다시 50개국의 관련 여부를 조사하고 1만 4000여명을 신문하는 등 광범위한 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사고 발생 3년 만인 1991년 11월 리비아 소행이라는 단서를 찾아냈다.

미국이 지목한 용의자는 리비아 정보요원과 몰타 주재 리비아 항공사 직원이었다. 미국은 시한폭탄을 두 용의자에게 전달한 또 다른 인물의 연루 가능성도 확인했지만 정확한 신원은 파악하지 못했다. 미 정보기관이 찾아낸 증거물은 폭발사고 6개월 뒤 추락현장에서 발견한 손톱만 한 시한폭탄장치 파편과 셔츠 조각이었다. 감정 결과 파편은 폭탄을 터뜨릴 때 사용하는 스위스제 시한장치로 밝혀졌다. 미 정보기관은 이와 동일한 장치가 1980년대 리비아 정부에 의해 대량 구매된 사실과 몰타의 패션 상점에서 셔츠 조각을 판매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수사팀은 용의자들이 라디오 겸용 카세트 녹음기로 위장한 플라스틱 폭탄을 셔츠와 함께 가방에 넣은 뒤 가방을 몰타 공항에서 탁송 화물로 보내 프랑크푸르트에서 팬암기에 실려 런던을 거쳐 뉴욕으로 가도록 했는데 가방이 로커비 상공 3만1000피트 고도에서 폭발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추락현장에서 발견한 셔츠를 리비아 정보요원에게 팔았다는 몰타 상인의 증언이 물증과 연결짓는 유일한 고리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다보니 폭탄이 내장된 가방이 공항 검색대를 어떻게 통과했는지도 밝히지 못한 채 미국이 일부러 리비아를 지목한 거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미 팬암기 폭발을 보도한 타임지

 

카다피와 서방국가 간 화해와 새 용의자 신병 확보

진실이 무엇이든 미국은 용의자들을 기소하기 위해 카다피에게 신병을 요청했지만 카다피는 송환을 거부했다. 그러자 유엔 안보리가 1992년 3월 결의안을 채택했다. ▲항공기의 리비아 운항 금지 ▲리비아에 무기 판매 또는 이전 금지 ▲북미 국가들의 대 리비아 외교관계 격하 등을 담은 결의안이었다. 그래도 카다피가 범인 인도를 거부하자 유엔은 ▲리비아의 일부 해외자산 동결 ▲석유수송 터미널 및 정유소용 일부 장비의 수입 금지 등 더욱 강력한 제재조치로 리비아를 압박했다. 카다피는 계속 용의자를 인도하지 않고 미국과 지루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그럴수록 리비아 경제는 피폐해지고 카다피는 궁지로 내몰렸다.

결국 견디지 못한 카다피는 “미·영 법정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중립적인 제3국의 법정을 제시하는 타협안으로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미국과 리비아는 넬슨 만델라 당시 남아공 대통령 등의 중재로 1998년 8월 용의자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용의자들은 1999년 4월 네덜란드로 인도되었다. 재판은 2000년 5월부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부근 미 공군기지 캠프에서 스코틀랜드 재판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재판과정에서 용의자들은 혐의를 부인했으나 판사는 2001년 1월의 1심 판결에서 1명(압델 바세트 알리 메그라히)에게는 종신형, 다른 1명(라민 칼리파 피마흐)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종신형은 2002년 3월의 2심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두 용의자. 메그라히(왼쪽)와 피마흐

 

재판이 마무리되자 카다피가 서방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노렸다. 구체적으로는 2003년 8월 희생자 270명의 가족에게 1000만 달러씩 모두 27억 달러(약 3조 2000억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보상안에 합의했다. 유엔은 카다피의 이런 노력을 인정해 제재 11년 만인 2003년 9월 제재 결의안을 해제했다. 카다피는 2003년 12월 19일 ‘대량살상무기(WMD) 포기 및 국제사찰 수용’ 선언으로 화답했다. 미국 역시 2004년 2월 리비아에 대한 여행 금지를 해제함으로써 오랫동안 불편했던 관계를 정상화했다. 2004년 9월 20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리비아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함으로써 통상 금지, 항공운항 금지, 미국 내 리비아 정부 자산 동결, 석유 수입 금지 등의 모든 제재조치가 풀렸다. 2006년 5월에는 미국이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리비아를 빼고 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카다피는 서방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제대로 활용해보지도 못하고 2011년 10월 20일 리비아 민주화 세력의 시민군에게 피살되었다. 수감된 메그라히는 암에 걸려 2009년 풀려난 뒤 호화빌라에서 살다가 2012년 5월 고향인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숨졌다. 그는 죽을 때까지 무죄를 호소하면서 자신을 기소한 조치가 국제적 음모라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지 못해 기소하지 못한 용의자(아부 아겔라 마수드)가 카다피가 죽고 없는 2012년 다른 혐의로 리비아 사법 당국에 체포되면서 수사에 새로운 물꼬가 터졌다. 용의자(마수드)는 1988년 정보기관의 지시로 시한폭탄이 설치된 가방을 몰타 공항까지 운반하고, 11시간 후 폭발하도록 타이머를 맞춘 뒤 사건 초기 체포된 메그라히와 피마흐에게 건네줬다고 리비아 당국에 진술했다. 미 FBI는 2017년 이 진술서를 입수한 뒤 보강 수사를 거쳐 사건 발생 32주년이 되는 2020년 12월 마수드를 기소했다. 그리고 리비아와의 협상 끝에 2022년 12월 11일 마침내 그의 신병을 확보함으로써 마지막 수순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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