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긴급조치 1호 발동… ‘긴조 시대’ 개막

↑ 대통령 긴급조치 1, 2호를 다룬 1974년 1월 9일자 동아일보 1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뿐”이던 세상

1974년 1월 8일 오후 5시를 기해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이로써 1970년대 중·후반 한국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던 이른바 ‘긴조 시대’가 개막되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긴급조치 1호 위반자를 처리하기 위해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한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2호도 함께 선포했다.

긴급조치는 유신 헌법 철폐운동을 봉쇄하기 위해 내려진 굴종과 침묵의 강요였다. 첫 위반자는 장준하와 백기완이었다. 두 사람은 1974년 1월 15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2월 1일 각각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지하는 긴급조치 1호 선포에 맞춰 쓴 ‘1974년 1월’이라는 시에서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고 했다.

정부는 강압적인 긴급조치 1호로 학생과 재야 인사의 저항 의지가 꺾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1974년 3월 신학기를 맞아 학원가는 다시 술렁거렸고, 정부는 실체 불명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내세워 학생운동의 일망타진을 노렸다. 4월 3일에도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해 전국에서 1000여 명의 학생을 잡아들였다. 주요 내용은 “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연락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으로,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것이다.

1호와 4호는 그해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박 대통령이 국민총화가 다져졌다는 이유를 들어 선포한 긴급조치 5호(8월 23일)로 해제되었다. 1호와 4호 위반으로 구속된 인사는 200명이 넘었다. 이들 중 반공법 위반을 제외한 대부분은 1975년 2월 15일 석방되었다. 1호, 4호가 유신헌법에 대한 도전을 차단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1월 14일에 선포한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는 1973년 10월의 오일 쇼크가 야기한 경기불황과 경제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서민 대중의 생활 안정을 꾀하고 고소득층의 양보를 요구한 조치였다. 3호는 주요 내용이 법으로 반영되어 1974년 12월 31일 긴급조치 5호 선포로 해제되었다.

 

누구나 긴급조치의 올가미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1호와 4호 해제로 7개월 동안 사라졌던 긴급조치가 다시 부활한 것은 1975년 봄이었다. 새 학기 개학에 맞춰 고려대를 비롯한 학원가에서 격렬한 반정부 시위가 다시 시작되자 1975년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해 고려대에 휴교령을 명하고 군대를 진주시킨 것이다. 그래도 학원 시위와 개헌 주장이 끊이질 않자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7호를 해제하는 긴급조치 8호와 함께 그동안의 긴급조치를 집대성한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베트남의 공산화(4월 30일)에 충격을 받은 박 대통령이 안보를 이유로 고삐를 더욱 조인 것이다.

9호는 유언비어의 날조와 유포, 헌법의 개폐 주장, 학생들의 정치집회와 시위 심지어 긴급조치 비방까지 철저히 금지했지만 형량이 현실화되었을 뿐 주요 내용에서는 1호, 4호와 큰 차이가 없었다. 형량은 1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하며 재판도 일반 법정에서 하는 것으로 했다.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형량도 사형, 무기 등 극형에 처한 1호, 4호에 비해서는 상당히 축소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처벌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은 긴급한 것이 아닌 일상적인 것에까지 법망이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긴급조치의 일상화였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학생이었지만 자영업자, 회사원, 농부 등 평범한 국민 역시 긴급조치의 올가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지금 잣대로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긴조 시대’에는 중죄로 둔갑하는 일이 허다했다. 주점의 취객, 손금을 봐주던 점술가, 다방의 손님, 학생을 가르치던 교사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유신과 박 대통령에 대해 푸념이나 비판을 하다가 여지없이 철창 신세를 졌다.

 

사법부도 “긴급조치 시녀” 비난 들어

언론은 물론 모든 사회적 언로가 이처럼 꽉 막히다 보니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이 때문에 무심결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을 옮기던 민초들이 유언비어 날조로 또 처벌받아야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긴급조치가 활개를 치는 동안 사법부 역시 “긴급조치의 시녀”라는 비난을 들으며 암흑기를 맞았다. 일부 유신 판사들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판결을 내렸다. ‘속전속결’과 ‘정찰제’가 당시 판결의 특징이었다. 선고 형량이 검찰의 구형량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판결 내용 역시 기소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잇따른 긴급조치 발동과 학생들의 구속은 학생운동의 역량을 소진시켰다. 해체된 학생회 대신 임명제의 학도호국단이 들어섰고, 완전무장한 전투경찰이 교내에 상주했다. 학생들 사이에 허무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대학가는 기나긴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대학가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송창식의 ‘고래사냥’이었다. 노래 가사대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뿐”이었다. 울분은 화장실 벽에 뒷골목 담벼락에 쏟아냈다. 맞고 갇히고 술을 퍼마시기를 5년 11개월. 마침내 박 대통령이 죽고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이 “8일 0시를 기해 긴급조치를 해제한다”고 발표함으로써 1970년대의 ‘괴물’ 긴급조치도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동안 589건이 적발되어 1050명이 구속되었다.

2007년 1월 31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과거사위)’가 공개한 긴급조치 위반사건 분석에 따르면 긴급조치에 대한 전체 재판건수 1412건 가운데 91%가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유형별로는 대통령과 유신체제를 비판한 행위가 282건(48%)으로 가장 많았고 학생운동 사례가 191건(32%)이었으며 재야․정치운동 사례가 85건(14.5%)이었다. 과거사위는 당시 긴급조치에 입각해 판결을 내린 판사의 실명을 공개했다. 실명공개를 찬성한 측은 “유신시절 사법부가 잘못한 것을 짚고 넘어간다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주장한 반면, 공개를 반대한 측은 “과거 판결을 부도덕한 것으로 낙인찍는 것은 사법부를 이념논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긴급조치 정리>

선포일 해제일 주요 내용
1호 74.1.8 74.8.23 유신헌법 개정․폐지의 주장․청원 금지
2호 74.1.8 비상군법회의 설치
3호 74.1.14 74.12.31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재정경제상 조치
4호 74.4.3 74.8.23 민청학련 관련자 처벌
5호 74.8.23 긴급조치 1호․4호 해제
6호 74.12.31 긴급조치 3호 해제
7호 75.4.8 75.5.13 고려대 휴교령. 교내 시위 금지
8호 75.5.13 긴급조치 7호 해제
9호 75.5.13 79.12.7 유언비어 날조․유포 금지. 헌법 부정․반대․왜곡․비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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