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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어데 가봤니껴 6-③] 하회권(서남권) : 하회마을, 하회구곡(화천구곡), 부용대, 옥연정사, 병산서원, 류성룡

↑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전경

 

by 김지지

 

당연한 말이지만 유물·유적 답사 여행은 미리 공부하고 가는 것이 좋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공간이 워낙에 넓어 자칫 주마간산식으로 끝날 수 있는 하회마을과 주변 지역도 마찬가지다. 과거 두 차례나 다녀왔지만 미리 숙지하지 않고 떠난 나의 하회마을 답사는 그래서 많이 아쉬웠다. 하회권(서남 지역)에서 둘러보아야 할 주요 명소는 하회마을, 부용대, 옥연정사, 병산서원 등이다. 그중 최고 조망은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 전경이다. 속이 다 시원하고 탄성이 절로 터져나온다.

하회마을 지도

 

▲하회마을
하회마을은 600여년 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인 동성 집성촌

하회마을은 도산서원과 함께 안동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다. 앞으로는 마을을 감싸도는 낙동강의 지류인 화천(花川)이 흐르고, 마을과 화천 사이에는 넓게 퇴적된 백사장이 펼쳐지며 백사장 옆으로는 노송림(만송정)이 울창하다. 낙동강은 강이 지나는 마을마다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곳 주민들은 마을 옆으로 흐르는 강을 화천으로 불렀다. 하회(河回) 이름은 ‘강(河)이 마을을 돈다(回)’는 뜻이다. 실제로 건너편 부용대에서 바라보면 화천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상공에서 촬영한 하회마을과 화천 (출처 경상북도)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가문이 600여년 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 집성촌이다. 조선의 유학자 겸암 류운룡(1539~1601)과 영의정 출신이자 ‘징비록’을 쓴 서애 류성룡(1542~1607) 형제가 태어난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그 후손들이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곳이 하회마을이다. 2010년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고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하회마을에는 한말까지 350여 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127개 가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회마을에서 국가 지정 보물은 양진당과 충효당 등 4점이고 국보는 병산탈과 징비록이다. 이처럼 많은 가옥이 지금도 생활공간으로 이용되고 있고 마을의 상징물도 여기저기 많아 미리 알고 가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런 탐방객들을 위해 마을 입구 안내소에 가이드가 있지만 현장에서 듣는 짧은 설명은 금방 잊혀진다. 이런 분들을 위해 하회마을과 주변에서 꼭 둘러보아야 할 명소를 소개한다.

 

하회마을의 중심은 수령 600년의 삼신당 느티나무

하회마을은 매표소에서 1㎞ 거리의 하회마을 입구까지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그러나 오솔길이어서 일부러 걸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 화천(낙동강) 너머로 화천정사와 옥연정사가 보인다. 그 옆 진회색의 거대 바위 꼭대기가 부용대다. 옆에서 계속 따라다니는 백사장이 희고 곱다. 마침 벚꽃도 절정이다. 이곳 벚꽃은 배꽃처럼 온통 흰색이다. 벚꽃 특유의 분홍색이 아니어서 차분하다.

하회마을의 중심은 마을 한가운데에서 오랜 세월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수령 600년의 삼신당 느티나무다. 옆으로 퍼진 둘레가 어마어마하다. 정월대보름 밤 이곳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벌어진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이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양진당과 화경당(북촌댁)이 부근에 있으니 세트로 둘러보면 좋다.

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양진당(보물 제306호)은 풍산 류씨의 종갓집이다. 하회마을 입향조인 류종혜가 14세기 말 하회마을에 처음 들어올 때 터를 잡은 곳으로 지금 건물은 류운룡·류성룡 형제의 부친 류중영이 지었다. 지금은 류운룡의 후손이 산다. 사랑채 앞에 걸려있는 ‘입암고택’ 현판은 류중영의 호 ‘입암’에서 땄고 양진당 현판 이름은 풍산 류씨 족보를 처음 완성한 류영의 호에서 땄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해 지금의 양진당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원래는 99칸이었으나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하회마을 양진당

 

충효당(보물 제414호)은 류성룡 가문의 종택이다. 류성룡의 손자 류원지가 할아버지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들과 뜻을 모아 1600년대에 지었다. 충효당 이름은 류성룡이 평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고 강조한 데서 유래한다. 현재 안채에는 종손이 살고 있다. 충효당 뜰에는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때 심은 구상나무가 있다. 충효당 사랑채 오른편에는 영모각 이름의 전시관이 있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류성룡의 유물을 보존·전시하고 있다. 전시관 이름은 류성룡이 쓴 ‘영모록(永慕錄)’에서 따오고 현판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화경당(북촌댁)은 영남 일대에서 200년간 부와 명예를 누려온 품격 높은 고택이다. 1797년(정조 21년) 류사춘이 짓고 1862년(철종 13년) 증손자 류도성이 증축했다. 규모가 웅장하고 대갓집의 격식을 갖추어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회마을에서 칸수가 가장 많다. 이곳의 품격은 세 군데의 사랑채에서 나타난다. 할아버지가 거처하던 북촌유거, 아버지가 거처하던 화경당, 손자가 거처하던 수신와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 북촌유거의 누마루에 앉아서 주변을 바라보면 하회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화산이 들어오고, 북쪽으로 부용대와 강물이 보이며, 남쪽으로 남산이 마주친다. 북촌유거 뒤편의 소나무는 하회마을을 굽어 돌고 있는 강물의 형상을 하고 있어 또 다른 볼거리다. 화경당 주인은 다른 부자들보다 소작료를 싸게 받았다. 이런 이유로 부자들을 공격하던 동학군이 화경당에 와서는 정중하게 인사만 나누고 지나갔다고 한다.

하회마을 충효당

 

▲하회구곡(화천구곡)

하회마을 바깥으로는 화천(낙동강)이 S자로 휘돌아 흘러간다. 이 화천과 하회마을 사잇길에는 부근의 낙동강 절경을 대표하는 9곳의 전망 표식이 있다. 이른바 하회구곡(河回九曲)인데 류운룡의 후손인 류건춘이 18세기말 퇴계의 도산구곡가, 이이의 고산구곡가 처럼 하회구곡의 아름다움에 반해 설정했다. 류건춘이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면서 설정한 하회구곡은 1곡 병산(屛山), 2곡 남포(南浦), 3곡 수림(水林), 4곡 겸암정(謙巖亭), 5곡 만송(萬松), 6곡 옥연(玉淵), 7곡 도포(島浦), 8곡 화천(花川), 9곡 병암(屛巖)이다.

1곡 병산은 병산서원 맞은편에 병풍처럼 펼쳐있는 산이고 2곡 남포는 병산서원에서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고갯길을 넘으면 마을로 들어가는 강변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하회구곡’을 노래한 류건춘의 시에 따르면 당시에는 이곳 포구에 무지개 같은 다리, 즉 홍교(虹橋)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3곡 수림은 남포(2곡)에서 하류쪽 1.7㎞ 지점 강변의 상봉정이라는 작은 정자를 품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 숲이다. 노을이 질 무렵, 수림이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든다 하여 하회 16경의 하나인 수림낙하(水林落霞)로 지정되었다. 4곡 겸암정은 부용대 상류 쪽 언덕 위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겸암정사이고 5곡 만송은 하회마을 쪽 강둑을 덮고 있는 소나무숲이다. 6곡 옥연은 만송 맞은편 절벽인 부용대 아래의 굽이다.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강물이 이곳에 이르러 깊어지는데, 깨끗하고 맑은 물빛이 옥과 같아서 이름이 ‘옥연’이다. 류성룡이 옥연 위에 지은 집이 옥연정사다.

7곡 도포는 낙동강이 굽이 도는 지점에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형성되었던 작은 섬으로 보인다. 8곡 화천은 7곡에서 하류로 좀 더 내려가 물굽이가 형성되는 지점이다. 화천 건너편에 류운룡을 기리는 화천서원이 있다. 9곡 병암은 화천서원 맞은편에 자리한 암벽이다. 하회구곡의 절반은 하회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체를 만나는 게 쉽지 않지만 절반이라도 둘러보는 맛은 나름 쏠쏠하다. 나머지 절반은 기회를 보아 둘러볼 계획이다.

하회구곡 중 제8곡 화천

 

▲만송정

만송정은 넓은 모래 퇴적층에 조성된 소나무숲으로 하회마을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있다. 천연기념물 제473호다. 류운룡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해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해 만송정(萬松亭)이다. 다만 1983년에 세운 만송정비(萬松亭碑)에는 현재의 숲이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숲에는 수령이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 매년 음력 7월 16일 밤, 이 숲에서 강 건너편 부용대 꼭대기까지 밧줄로 이어 불꽃을 피우는 선유(船游)줄불놀이가 펼쳐진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만송정

 

만송정에서 하회마을로 진입하는 곳에도 400년 수령의 소나무가 있다. 옆으로 퍼진 모습이 분재처럼 보이는데 높이 6m, 흉고 둘레 1.5m나 되는 커다란 나무가 이런 기품을 유지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400년 수령의 소나무

 

▲부용대

하회마을에서 강쪽을 바라본다. 백사장 앞 강 건너편에 깎아지른 듯한 64m 높이의 암벽이 버티고 있다. 부용대다. 이곳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하회마을 전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왜 이곳 이름이 ‘강(河)이 마을을 돈다(回)’는 하회인지 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실제로 화천(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길게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른다. 하회마을 너머로는 화산(328m) 능선이 길게 이어져있고 하회마을과 부용대 사이에는 화천과 백사장이 넓게 자리잡고 있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이 물에 떠 있는 연꽃과 같다고 해서 풍수지리에서는 하회마을을 ‘연화부수형’ 지형으로 분류한다. 부용대 이름도 연꽃에서 유래하고 이곳의 산과 강을 화산(花山)과 화천(花川)이라 하는 것도 연화(蓮花)에서 비롯되었다. 하회마을은 물가에 있지만 어지간해서는 홍수 피해를 입지 않는다. 부용대가 화천 물줄기의 완충 역할을 해주고 거센 물길이 마을을 비켜가도록 안내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부용대 위치가 조금만 달랐어도 마을이 매년 물난리를 겪었을 것이라며 부용대를 신성시한다. 부용대 아래 화천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옥연정사, 겸암정사, 화천서원이 자리잡고 있다.

하회마을에서 바라본 부용대

 

화천서원은 부용대로 올라가는 입구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류운룡의 학덕을 흠모하던 지역 유림들이 1786년에 지었다. 1871년 대원군의 사원 철페령에 의해 파괴되어 100년 이상 폐서원된 것을 후손과 유림들이 1996년에 복원했다. 문루인 지산루에 올라 밖을 내다보면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만 최근 지어진 것이어서 고풍과는 거리 멀고 살짝 어수선하다.

 

▲옥연정사와 징비록

옥연정사는 류성룡이 만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6년(선조 19년) 지은 건물이다. 하회마을에서 바라보면 부용대 오른쪽 아래에 있고, 화천서원을 지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류성룡은 높은 벼슬을 했지만, 청렴하게 살아 실제 생활은 가난했다. 작은 서당을 짓고 싶었지만, 형편이 여의치 못했다. 그러자 가까이 지내던 탄홍 스님의 지원으로 완성되었다. 옥연정사는 임진왜란 전란사인 ‘징비록’(국보)을 저술한 곳으로 유명하다. 마당엔 류성룡이 직접 심었다는 노송 한 그루가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은 채 400여 년 동안 인적 드문 옥연정사를 홀로 지키고 있다. 옥연정사는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년),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하다.

류성룡 생존 시에는 형 류운룡이 학문에 정진하고 제자를 양성했던 겸암정사(謙庵精舍)로 이어진 좁다란 길이 부용대 아래 절벽을 따라 있었다. 류성룡은 수시로 형을 만나러 그 길을 지나갔다. 수백년 전 형제의 우애로 다져진 길이 궁금해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지만 길 안쪽으로 10~20m 들어가 보았다. 길은 한 사람이 겨우 발을 내디딜 정도로 좁았다. 무엇보다 관리를 하지 않아 낙엽이 썩지 않은 채 수북히 쌓여있다. 자칫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 있어 바로 포기했다. 역사적인 길이라 잔도라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부용대의 자연상태를 망가뜨릴 수 있어 조심스럽다.

하회마을 옥연정사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고위 관직에 있었다. 전쟁 중에는 최고 관직인 영의정이자 전시 총사령관격인 도체찰사로 전쟁 수행의 중심 역할을 했다. 장수 임명에 관여하고 전략을 세우는 등 전쟁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했다. 그만큼 전쟁을 누구보다 대국적이고 종합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 정적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임진왜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 그대로 서술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일본 사신들의 언행, 임금의 피난 실상, 조정 신하들의 행태, 백성의 참상, 명나라와의 관계, 일본과의 강화과정, 그리고 이순신의 전사까지 67개 항목을 최대한 중립적 입장에서 담담하게 기록했다. 임진왜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엄중한 마음으로 책명은 ‘징비록(懲毖錄)’으로 정했다. ‘징비(懲毖)’는 “나의 오늘 잘못을 징계하여 뒷날의 환난에 대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여기징이비후환)”라는 뜻으로 ‘시경’에 나온다.

옥연정사 (출처 옥연정사 홈페이지)

 

▲겸암정사

겸암정사(謙庵精舍)는 류운룡이 학문에 정진하고 제자를 양성했던 장소다. 류운룡은 28세가 되던 1567년 부용대 서편에 겸암정자를 세웠다. 스승인 퇴계가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낮춘다’는 뜻이 담긴 ‘겸암정(謙菴亭)’이라는 현판을 써주었다. 류운룡은 겸암 이름을 귀하게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 하회마을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편에 우뚝 솟은 부용대의 서쪽 강물이 크게 감돌아 굽이치는 절벽 위 소나무 숲 속에 있다.

경사가 가파른 곳에 지어져 사랑채는 누각 형식이다. 누각에 앉으면 강 건너 만송정 숲과 하회마을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부용대에서 겸암정사든 화천정사든 내려가는 거리는 비슷하므로 부용대를 넘어 반대편으로 다녀와도 좋다. 다만 아쉬운 것은 공간이 좁은 겸암정사를 가정집으로 활용하다 보니 어수선하고 산만하다는 것이다.

부용대 왼쪽 아래에 자리잡은 겸암정사

 

▲병산서원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을 두루 갖춘 서원

병산서원은 아스팔트길에서 비포장 흙길을 2㎞ 정도 들어간 곳에 있다. 흙길이어서 차로 이동하든 걸어가든 살짝 불편하다. 병산서원 측이 일부러 아스팔트를 깔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옛길을 느껴보라는 뜻이리라. 덕분에 옛 서원을 찾아가는 느낌이 제대로다.

병산서원은 류성룡과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본래 풍산현(지금의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1575년(선조 8년) 류성룡이 후학 양성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1607년 류성룡이 타계하자 1614년 제자와 유생들이 이곳에 위판을 모시는 사당으로 용도를 바꾸면서 강학을 연구하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을 두루 갖춘 정식 서원이 되었다. 철종 14년(1863)에 ‘병산’이라는 사액(임금이 서원, 사당 등의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림)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살아남은 47곳 서원 중 하나다. 이곳은 400년 동안 지속돼 왔던 영남 유림들의 위패 서열 갈등인 이른바 병호시비(屛虎是非)의 무대이기도 하다. 병산서원은 절묘한 경치와 뛰어난 건축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보존이 잘되어있어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불린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병산서원 (출처 병산서원 홈페이지)

 

병산서원 앞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쌓아놓은 백사장이다. 강 건너편엔 짙푸른 병산(屛山)이 병풍 치듯 서 있다. 병산의 ‘屛(병)’도 병풍 병이다. 서원 앞 큰길에서 서원 대문까지 길 양옆으로 배롱나무들이 서 있다. 2008년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380년, 수고 8m, 둘레 0.85m인 배롱나무를 포함해 약 120여 그루가 자라고 있어 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한창일 때 배롱나무꽃은 진분홍 레이스를 두른 듯한 모습이다. 그것을 본 오태진 전 조선일보 기자는 “사람을 달뜨게 하는 화려함이 아니라 눈과 마음을 씻어 주는 화사함”이라고 했다.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 우리나라 건축가들에게는 제1의 답사지

병산서원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꼭 있어야 할 건물들이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다. 대문인 복례문도 여염집 문간처럼 수수하다. 안동 도산서원이나 영주 소수서원에 비교하면 매우 단출하다. 복례문 지나 계단 올라서면 바로 만대루(보물 제2104호)이고, 만대루 아래를 지나 또 계단 오르면 입교당이다. 건물은 류성룡을 모시는 사당까지 8채다.

만대루는 200여 명을 수용하는 장대한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이다. 건축 구조는 극히 단순하다. 1층, 2층 모두 특별한 장치 없이 기둥으로만 이루어진 비어 있는 공간이다. 덕분에 서원 앞에 펼쳐진 낙동강 물줄기와 백사장과 그 너머 병산의 절벽 풍경이 안마당까지 유입된다. 우리나라 건축가들에게 제1의 답사지로 꼽히는 이유다.

만대루 이름은 중국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翠屛宜晩對·취병의만대)’에서 따 왔다.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2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이곳의 경치 중 으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은 올라가지 못한다. 단체 방문객이 많아지면서 누각이 버텨내지 못할까 염려해서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의 입교당(立敎堂)은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유생을 가르치는 공간이다. 입교당 뒤에 류성룡 부자 위패를 모신 존덕사가 있고 바로 앞에 400살 가까운 8m 높이의 배롱 거목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뒤에서 바라본 병산서원 만대루. 그 너머 산이 병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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