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드레 브르통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운동의 정초자이자 교주
‘다다이즘’이 유럽 전역에서 맹위를 떨친 것은 1차대전이 발발(1914)한 후였다. 그러나 1920년대 들어 다다이즘 자체에 내포된 부정과 현실 전복의 성격에 따라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붕괴의 운명을 걸었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일군의 작가와 화가들이 쇠락하는 다다이즘의 강력한 에너지와 창의성을 살려 초현실주의를 구체화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인습을 경멸하고 전 세계가 미쳤다고 확신했다는 점에서는 다다이스트와 입장이 같았으나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다다이즘과 달랐다. 그들의 해결 방안은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의 환상과 무의식의 세계로 돌아감으로써 새로운 실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24년 10월,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1892~1966)을 비롯해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젊은 문화예술가들이 파리에서 발간되는 ‘초현실주의자 혁명’지를 통해 향후 20여 년 간 대대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킬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브르통은 선언에서 초현실주의를 “이성에 의한 하등의 통제 없이, 미학적·윤리적인 일체의 선입관을 배제한 채 마음의 참된 작용만을 말과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심적 오토마티슴(자동기술법)”이라고 정의했다. ‘초현실주의자 혁명’지는 브르통을 비롯해 프랑스의 루이 아라공(시인), 폴 엘뤼아르(시인), 앙드레 마송(화가), 조르조 드 키리코(이탈리아 화가), 막스 에른스트(독일 화가)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29년까지 파리에서 간행되다가 1930년 정치·사회적 입장을 분명히 한 새로운 기관지 ‘혁명에 봉사하는 초현실주의’로 제호를 바꿔 1933년까지 파리에서 출간되었다.
초현실주의 용어를 처음 창안한 것은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그는 혁신적인 예술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다. 장 콕토의 무용극 ‘퍼레이드’(1917)에 대해 “예술적 진실은 리얼리즘을 초월한 초현실주의(sur-realism)”라고 작품 해설을 했고, 자신의 전위예술 작품인 ‘테레시아스의 유방’(1918)에 ‘초현실주의 연극’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초현실주의들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이념을 공공연히, 그것도 공격적인 방식으로 선언한 것은 미래주의와 다다이즘이 그랬듯 아방가르드(전위예술) 예술운동의 핵심적 특징이었다. 전통 예술은 도제적 학습 방식을 통해 기술적 비밀이나 작업 방식을 배타적으로 공유하고 이를 후배에게 물려주는 방식으로 계승되지만 아방가르드 예술은 선언문을 통해 이전까지의 시대와 문화를 비판하면서 기존 질서와의 단절을 드러내고 새 시대를 향한 의지를 표명했다.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선언문을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브르통의 선언문 역시 초현실주의의 핵심이다.
이성과 논리의 울타리 너머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세계에 주목
초현실주의자들은 1925년 11월 파리에서 첫 초현실주의 그룹전을 열었다. 브르통은 전시회 카탈로그 서문에서 기존의 정치·사회제도를 전복시키지 않고서는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비록 상업적 성공을 거두진 못했으나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조르조 드 키리코,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스페인 화가), 장 아르프(독일 조각가·화가) 등이 참여한 대규모 전시라는 점에서 현대미술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운동의 정초자였고 절대적 힘을 갖고 있는 신흥종교의 교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종래의 이성과 논리의 허구성을 직시하고 이성과 논리의 울타리 너머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세계에 주목했다. 따라서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무의식의 세계를 처음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받아들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자신의 예술 이론을 끄집어냈으나 막상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무의식의 세계를 형상화한다며 정신분석학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무의식의 효과를 ‘의식적’으로 고안한 어떤 시도도 그 전제에 대한 부정”이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사실 자신을 완전히 외부 세계와 분리하려면 무의식 상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완전한 무의식 상태에서 무엇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분석학의 개념과 어휘를 적극 활용해 유럽 예술계의 막강한 문화 권력으로 떠올랐다.
브르통이 선언문에서 언급한 심적 자동기술법(오토마티슴)은 1차대전 때이던 1915~1916년 의무병으로 근무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법으로 노이로제 환자들의 독백과 같은 의식의 자유로운 흐름을 가능한 빠르게 받아 적는 기술법이다. 즉 이성의 통제로 사고를 체계화하고 정리해서 표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머리에서 떠오르는 그대로를 흐르는 물처럼 받아쓰는 것을 말한다. 브트롱은 또한 의식에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강조했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은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의 핵심적 특징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꿈과 무의식의 내면 세계에서 들려오는 이미지를 그대로 기술하는 자동기술법 방식으로 글을 썼다. 화가들은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공상·환상의 세계, 즉 인간의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에 의한 상상의 세계를 그려내기 위한 다양한 기법을 개발했다.
르네 마그리트는 사물을 일상적인 질서나 배경, 분위기에서 떼어내 그 사물의 속성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엉뚱한 장소에 놓음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심리적인 충격을 일으키게 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달리는 하나의 대상을 2중 3중의 다른 이미지로 보는 병적인 착각을 이용해 말이 여인의 나체로 보인다거나 하나의 풍경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거나 하는 중복상을 교묘하게 표현했다. 또한 극사실적 묘사에 의한 정신병자의 편집광적 심리가 나타나는 회화도 탄생시켰다.
미로는 놀이하듯 자유롭게 미끄러지는 검은 선과 강렬한 원색의 추상적인 그림을 그렸다. 별, 여자, 새, 달 등을 상형문자처럼 단순한 형태로 화면을 구성해 어린아이 낙서와 같은 천진함과 자유분방함을 드러냈다. 에른스트는 자신이 개발한 프로타주 기법으로 주목을 받았다. 프로타주 기법은 백지 밑에 요철이 있는 물체를 놓고 연필이나 목탄 등으로 표면을 긁듯이 문지르면 밑에 있던 사물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는 기법으로 화가의 의식과 활동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자동적인 반응을 표현한다. 조각에서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장 아르프, 사진에서는 만 레이가 초현실주의 작품 활동을 하고 영화에서는 루이스 부뉴엘이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제작한 최초의 초현실주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1929년 10월 상영했다.
브르통은 1929년 12월 ‘제2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제 예술은 작품 제작이나 미의 자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각되지 못한 것과 예술의 미개척 분야를 밝히고 정치·사회적 혁명 사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한때는 공산주의자들을 열성적으로 후원하기도 했으나 통일된 정치 강령을 내놓지는 못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 공산주의의 엄격한 신조를 신봉할 수 없고 무산계급과도 거리가 먼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는 1929년 이후 파리, 런던, 뉴욕, 브뤼셀, 도쿄 등 다른 국제도시들로 급속하게 확산되었으나 점차 유럽에 파시즘과 나치즘이 발호하면서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유럽에 몰아친 광기는 1938년 1월 파리에서 개막된 대규모 초현실주의 국제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국제전은 마치 초현실주의 미술의 종언을 예고하듯 기존의 미술과 전혀 다른 무질서와 몽상적 환상의 축제로 이뤄졌다. 14개국 화가 70명이 출품한 전시회는 흔히 화랑에서 보아온 장식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성공을 거뒀다. 1만 2,000여 개의 석탄 자루를 천정에 늘어뜨리고 또 전시장 안의 조명을 희미하게 해서 동굴 속 같은 분위기를 냈으며 객석에 흙탕물을 튀겨도 관람객들이 재미있어 했다. 애초에 사람들을 화나게 하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초현실주의가 하나의 멋이 되어버린 것은 역설이었다. 결국 이 전시회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찬란한 절정이었으나 동시에 마지막 몸부림이기도 했다.
초현실주의가 전환점을 맞은 곳은 2차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1941)한 에른스트가 붓을 사용하지 않고 물감을 화면에 떨어뜨리거나 흘리는 드리핑 기법을 선보이고, 초현실주의 잡지가 창간(1942)된 1940년대의 미국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서서히 힘을 잃다가 1966년 브르통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