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엘비스 프레슬리 ‘로큰롤의 황제’로 부상

앨범 ‘하트브레이크 호텔’(1956년 1월)이 대히트 치면서 독주 채비 갖춰

갓 21세가 된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에게 1956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2년 전 데뷔 이후 미국 대중음악계에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다가 1956년 1월 발매한 앨범 ‘하트브레이크 호텔’이 대히트를 치고 같은 달 TV 프로그램 ‘스테이지 쇼’에 출연, 연초부터 독주 채비를 갖춰나갔기 때문이다. 엘비스는 TV 방송국에서 경련이 든 사람처럼 노골적으로 엉덩이와 다리를 흔들며 ‘하트브레이트 호텔’과 ‘셰이크 래틀 앤드 롤’을 불렀다. 그러자 프로그램이 끝났을 때 낯설고 외설적인 엘비스의 허리 아래 춤에 항의하는 전화가 방송국에 빗발쳤다. 하지만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이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춤에 환호로 화답했다.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록의 역사를 시작했다”는 찬사와 함께 4월 21일부터 8주 연속 전미 인기 차트 1위에 올랐다. 그해 8월과 11월 각각 발매된 ‘돈트 비 크루얼 / 하운드 독’과 ‘러브 미 텐더’까지 인기를 이어가면서 1956년을 명실상부한 ‘엘비스의 해’로 만들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미시시피주 투펄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948년 부모를 따라 테네시주 멤피스의 빈민가로 이사했다. 고교 졸업 후 트럭 운전을 하던 그는 ‘4달러만 내면 어떤 노래든 녹음해드립니다’라는 선레코드 스튜디오의 광고를 보고 평소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 그것을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주기 위해 1954년 7월 어느날 스튜디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컨트리 음악과 발라드곡을 불렀다. 하지만 녹음 관계자들은 노래를 잘한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특징적인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녹음 작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엘비스는 잠시 휴식 시간을 보낸 후 평소 스타일 대로 다른 가수의 노래 ‘댓츠 올 라이트(마마)’를 불렀다. 순간 녹음 관계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흑인과 백인이 비슷하게 공존하는 멤피스에서 자라, 백인이면서도 흑인의 감성과 음감을 자연스레 익힌 엘비스의 창법이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이다.

 

노래가 라디오 전파 타자 “노래 부른 가수가 누구냐” 전화 폭주해

이튿날 녹음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엘비스는 “마음대로 노래하라”는 녹음 제작진의 조언대로 편안하게 노래를 불렀고, 제작진은 비로소 스타 탄생을 예감했다. 곧 스튜디오 직원이 엘비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선레코드 사장에게 엘비스를 소개했다. 사장은 그의 노래를 듣고 음반 녹음을 결정했다.

선레코드는 ‘댓츠 올 라이트(마마)’가 수록된 앨범을 제작하기 전, 데모 싱글을 멤피스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건네주고 반응을 타진했다. 7월 10일 밤 9시 30분께 엘비스의 노래가 방송되자 “노래를 다시 틀어달라”,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냐”라는 등 전화가 방송국으로 폭주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엘비스는 1955년 11월 RCA 레코드사에 둥지를 틀었다. 1956년 1월 RCA에서 발매한 ‘하트브레이크 호텔’로 미국 남부 출신의 촉망받는 가수에서 미 전역을 휘어잡는 ‘로큰롤의 황제’로 재탄생했다. 뒤이어 발매된 ‘돈트 비 크루얼 / 하운드 독’까지 8월 18일 미국 차트 정상에 오르면서 엘비스의 인기는 대폭발했다. 이때부터 11주 동안 계속된 1위 기록은 1992년 R&B음악의 선풍을 일으킨 보이즈 투멘이 13주 동안 1위를 기록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차트 1위를 지킨 노래’로 기록되었다.

‘돈트 비 크루얼 / 하운드 독’은 11주 만에 왕좌에서 내려왔으나 11월에 발매된 ‘러브 미 텐더’가 뒤를 이어 왕관을 낚아챘다. 이 노래는 엘비스의 동명 영화 데뷔작의 사운드 트랙으로 탄생되었다. 영화는 1956년 11월 16일 전미 550개 영화관에서 동시에 개봉되었다. 엘비스는 개봉 전인 9월 9일 ‘에드 설리번 쇼’를 통해 먼저 노래를 소개했다. 82.6%라는 공전의 시청률을 기록한 ‘에드 설리번 쇼’에서 엘비스는 열광적으로 몸을 흔들어댔다. 5,400만 명의 시청자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여파로 영화가 개봉되기도 전에 이례적으로 사운드트랙이 먼저 발매되었다. 엘비스는 이 영화를 시작으로 1969년까지 모두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비틀즈 “그 이전에 아무도 없었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빙 크로즈비, 프랭크 시내트라 등의 감미로운 스탠더드 팝이 오랫동안 지배하던 음악계에 끈적거리면서도 격렬한 샤우트 창법을 구사하는 엘비스의 등장은 충격이었다. 엘비스에 앞서 점잖은 노래로 전성기를 구가한 선배 가수들은 엉덩이와 다리를 흔들어대며 팬들의 정신을 빼앗는 엘비스를 혹평했다. 시내트라는 “로큰롤은 거칠고 추하고 무모하고 사악하다”라는 혹평을 마다하지 않았고, 일부 여성단체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킬 위험한 존재”라며 그를 내쫓으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래도 젊은이들은 매력적인 목소리에 무대 매너와 외모까지 갖춘 엘비스에 환호하고 열광했다. 훗날 비틀스의 존 레넌은 “그 이전에 아무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고, 폴 매카트니는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찬사했다.

엘비스는 인기 절정이던 1958년 3월 일반 전투병으로 군에 입대해 서독의 미군 기지에서 근무하다 1960년 3월 전역했다. 이후 엘비스는 데뷔 초기의 빠른 템포에서 벗어나 스탠더드 팝 계열의 곡으로 변신을 꾀했다. 반응은 다르게 나타났다. 기성세대가 새롭게 관심을 보인 것과 달리 젊은 팬들의 반응은 전만큼 열광적이지 않았다.

이후 엘비스는 음악보다 영화 쪽에 전념했다. 촬영이 없을 때는 멤피스의 저택에 은거했다. 1968년 컴백 공연을 통해 재기에 성공하고 1973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생중계인 하와이 공연에서 다시 한 번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1977년 8월 16일 강박과 외로움을 잊기 위해 약물을 과다복용하다 42세로 숨졌을 때 멤피스의 한 일간지 1면 톱 제목은 ‘왕이 죽었다’였다.

생전에 엘비스는 빌보드 차트 10위권 안에 36곡, 1위에 17곡을 올리고 미국 내에서만 1억 장 이상, 전 세계 10억 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했다. 이 기록에 버금가는 음악인은 비틀스와 마이클 잭슨뿐, 누구도 이 기록을 추월하지 못했다.

 

☞로큰롤의 기원

 

로큰롤이 탄생하기 전, 미국에서 유행한 것은 ‘리듬&블루스(R&B)’와 ‘컨트리&웨스턴’이었다. ‘리듬&블루스’는 블루스가 남부 미시시피에서 북부 시카고로 올라오면서 비트와 리듬이 첨가된 흑인들의 음악이었다. 유럽의 민요에서 발전한 ‘컨트리&웨스턴’은 흑인음악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변형되긴 했으나 밋밋하고 반복적인 느낌 때문에 재미와 깊이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 백인 가수들이 흑인의 R&B 창법을 모방하고, 여기에 가스펠과 재즈를 가미해 강약이 있고 끈끈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 1950년대 후반 젊은이들의 통속적인 언어가 된 ‘로큰롤(Rockn Roll)’이다.

로큰롤의 등장을 본격적으로 알린 대표적 곡은 1954년 4월 ‘빌 헤일리와 혜성들’이 발표한 ‘셰이크 래틀 앤드 롤’과 ‘록 어라운드 더 클락(Rock around the clock)’이다. 특히 ‘록 어라운드 더 클락’은 국내 CF에도 자주 등장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거나 춤을 추게 하는 노래이지만 당시 젊은이들로부터는 큰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55년 3월 영화 ‘폭력교실’(원제는 블랙보드 정글)의 사운드 트랙으로 실리면서 급속도로 젊은이들 속을 파고들어 갔다.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로큰롤의 원년’은 1955년이다. 이유는 ‘록 어라운드 더 클락’이 영화(폭력교실) 개봉과 함께 그해 7월 9일부터 8주 동안 빌보트 차트 정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영화 개봉이 로큰롤을 하나의 음악 장르로 자리 잡게 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주인공(말런 브랜도 주연)의 행동과 결합되어 로큰롤이 젊은이들의 반항과 비행, 그리고 폭력과 관계된 음악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졌다는 점에서는 영화 개봉이 꼭 반가운 것만도 아니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문화 싹터

로큰롤은 ‘록 어라운드 더 클락’의 노래 가사에 “Rock, Rock, Rock Everybody, Roll Roll Roll”이 반복되는 것에 착안한 한 라디오 DJ가 ‘로큰롤(Rock’n’Roll)’이라고 부르면서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다만 ‘록 어라운드 더 클락’을 세상에 내놓은 빌 헤일리는 로큰롤의 영웅이 되지 못했다. 늘 히죽히죽 웃는 표정을 짓던 그는 다섯 아이를 가진 맘씨 좋은 아저씨 인상이었지 신선하고 충격적인 로큰롤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근사하고 멋진 로큰롤의 등장을 갈망하고 있을 때 등장한 것이 엘비스 프레슬리다. 로큰롤 역시 자신을 표현해줄 최고의 가수를 찾았다는 점에서 엘비스를 환영했다. 빌 헤일리와 비슷한 시기에 미 전역을 상대로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한 엘비스는 1956년 1월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히트시키면서 로큰롤 확산에 불을 질렀다. 이 때문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로큰롤의 황제’, 빌 헤일리는 ‘로큰롤의 아버지’로 불린다.

로큰롤의 등장으로 레코드 판매와 라디오 방송 선호도에서 뒤지게 된 기성 팝 가수들은 로큰롤을 향해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프랭크 시내트라는 라디오 방송에서 “로큰롤 가수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라 목을 조르고 소리만 지른다. 그들은 가수가 아니다!”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부모들은 다리를 떨고 엉덩이를 돌리며 노래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에 경악했다. “낯 뜨거운 성적 환상을 심어주어 새로운 세대들의 정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다. 젊은이들에게는 경쾌하고 신나는 음악이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음악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기성 세대들은 폭력영화 속에 흐르는 저질 음악이라며 비난의 화살을 록 음악 전체에 돌려버렸으나 젊은 세대에게는 비난이 들리지 않았다. 바야흐로 새로운 문화가 미국에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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