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병로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취임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변호사로 성가 높여

김병로(1887~1964)는 일제하에서 나라 없이 방황하는 ‘거리의 사람’이란 뜻으로 자신을 가리켜 ‘가인(街人)’이라고 칭했다.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을사조약 체결 후인 1906년, 19세의 나이로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해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일제의 ‘호남 대토벌 작전’에 가로막혀 더 이상 의병 투쟁을 할 수 없게 되자 실력 배양 운동으로 눈을 돌려 1910년 4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3년 메이지대 법과를 졸업하고 메이지대와 주오대가 공동운영하는 법률고등연구과에서도 법률을 공부했으나 조선인은 일본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1915년 7월 귀국해 경성전수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의 문화정치 표방에 따라 총독부가 조선인이라도 일정한 자격이 있으면 판사 자격을 인정해주는 것으로 방침을 바꿔 1919년 4월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다. 1920년 4월 변호사로 개업한 뒤에는 변호사와 사회운동가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사 운동을 비롯 소작쟁의, 노동쟁의, 동맹휴학 등 각종 사건들을 변호하는 데 동분서주했으며 1920년대의 항일운동 변호에도 늘 변호인석을 지켰다.

안창호·여운형 등 민족지도자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김상옥 의사 사건(1923년), 6·10 만세운동(1926년), 광주학생운동(1929년), 흥사단 사건, 조선공산당과 간도공산당 사건 등 무려 100여 건에 달하는 사건을 맡아 민족변호사로 성가를 높였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1930년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좌우합작 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해방 후에는 1945년 9월 창당한 한국민주당에 참여하고 좌우합작을 지지하며 중도우파 김규식과 중도좌파 여운형을 상대로 좌우합작의 성사를 위한 협상을 중재했다. 당시 미 군정은 좌우합작 운동을 적극 지원했기 때문에 1946년 7월 김병로를 미 군정청의 사법부장으로 기용했다. 1947년 6월 미 군정청이 남조선과도정부로 바뀌면서 김병로는 남조선과도정부의 사법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후 1년여 동안 대한민국의 법을 기초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자유당 정권이 수시로 사법부에 압력을 가했으나 정면으로 맞서

김병로는 사법부 안에 기초법전의 초안을 작성할 법전 기초위원회를 조직했다. 일제 말기에 바뀐 2심제를 1948년 4월 3심제로 부활하고 법원조직법, 변호사법, 검찰청법 등을 제정하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처럼 미군정청과 남조선과도정부의 사법부장으로 2년 1개월 동안 봉직하면서 김병로는 해방된 조국의 실정에 맞게 법 체계를 갖추는 일에 전념했다.

당시 법조계에서 차지하는 김병로의 위치는 거의 독보적이었다. 이 때문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김병로를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하는 것을 꺼려했다. 자신과 노선이 다른 김규식과 김병로의 좌우합작 노선이 같다는 것, 그리고 김병로의 고집을 꺾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법무장관으로 발표된 이인이 “김병로가 대법원장이 되지 않으면 나도 법무장관을 할 수 없다”며 강력히 추천해 1948년 8월 5일 김병로를 대법원장에 임명했다. 의회는 재석 157명 가운데 가 117표, 부 31표, 기권 3표, 무효 6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동의했다.

예상대로 김병로는 이승만에게 껄끄러운 존재였다. 두 지도자가 먼저 부딪친 것은 친일파 처벌 문제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장을 맡아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할 때 신속·공정한 재판을 강조하는 김병로와 달리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이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이 반민특위법 개정을 요청해도 거부했고 반민특위 활동을 이승만이 비판하면 반박하며 맞받아쳤다. 이승만은 눈엣가시 같은 김병로를 해임하고 싶었으나 탄핵이나 형벌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70세 정년 혹은 10년의 임기가 보장되어 있어 마음대로 해임할 수도 없었다.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부산 피란 시절 김병로는 “온 천하가 일자리는커녕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다”며 자주 점심을 굶거나 밀가루 죽으로 때웠다. 대법원장 공관 화장실엔 손바닥보다 작게 자른 신문지 묶음이 화장지 대신 매달렸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며칠 뒤 전남 담양의 친정으로 피란 가 있던 부인이 공비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을 때도 가정일은 사적인 일이라며 일체 내색하지 않는 초연함을 보였다.

휴전 후 자유당 정권이 수시로 사법부에 압력을 가할 때는 정면으로 맞섰고, 이승만이 공개적으로 사법부를 비난할 때는 반박 담화로 사법부의 권위를 지켰다. 이렇듯 이승만과 사사건건 맞붙다가 1957년 12월, 70세 정년이 되어 9년 8개월 만에 대법원장에서 물러났다. 정년 퇴임식에서는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는 말을 하고 떠났다.

퇴임 후에도 김병로의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1958년 12월 이른바 ‘2·4 보안법 파동’ 때는 국회의장의 경위권 발동을 격렬하게 비난했으며 국가보안법 개정에도 명백하게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한동안 조용히 지내던 김병로가 다시 기지개를 켠 것은 쿠데타 발발과 함께 금지되었던 민간인의 정치 활동이 재개된 1963년이었다. 김병로는 윤보선을 비롯해 민주정치의 회복을 바라는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민정당을 창당해 1963년 5월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뒤이어 4·19 직후 과도정부를 이끌었던 허정의 신정당,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의 민우당 등과 민정당을 통합한 ‘국민의당’을 창당해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가 1964년 1월 13일 7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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