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와 히틀러의 유대인 정책에 반대하는 발언 거침없이 쏟아내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는 ‘행동하는 신학자’요 ‘정치신학의 선구자’였다. 사회의 구원을 도외시한 채 개인적 구원에만 몰입하는 신학을 비판하고, 세속 세계에 적극 개입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점을 강조한 그의 정치신학은 2차대전 후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여성신학과 흑인신학 등으로 가지를 쳤고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본회퍼는 독일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를 신학으로 인도한 것은 1차대전에 참전한 둘째 형과 사촌 형들의 죽음이었다. 1923년 입학한 튀빙겐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27년 베를린대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29년부터 베를린대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했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언제나 소외당하는 사람에게 머물렀다. 베를린의 가난한 지역 교회 어린이들을 돌보고 1930년 9월 건너간 미국에서는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한편 흑인들의 할렘 교회에 참여했다. 1931년 10월 베를린공대의 학생 담당 사역자로 부임하고 11월 복음주의 교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본회퍼는 라디오 생방송 연설을 통해 “자신을 신성화하는 지도자는 신을 모독하는 자”, “직책이 아닌 인물에 매여 지도자를 세우는 것은 우상숭배로 이어질 뿐”이라고 비판했다. 당국은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방송을 중단시켰다. 본회퍼는 이렇게 나치 정권 시작부터 반동분자로 낙인찍혔다.
본회퍼는 히틀러만 비판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시대를 낳고 묵과해온 당시 독일의 신학과 교회의 현실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보수적이고 사변적인 신학자들은 추상적이고 낡은 교리 체계, 종교개혁 이후 정통주의에 의해 만들어져 이미 화석화한 신학을 반복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크리스천’연맹‘에 속한 목사들은 1933년 4월 ’독일 크리스천 제국회의‘를 열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활동을 지지했다.
히틀러는 독일 교회가 제3제국에 걸맞은 ‘독일제국교회’로 변신하도록 강권하는 한편 국민에게는 교회에 다니도록 독려했다. 히틀러와 교회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고 일부 목회자는 “그리스도가 히틀러를 통해 오셨다”며 히틀러를 우상화하기까지했다. 심지어 “히틀러가 그리스도”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목회자도 있었다. 독일 크리스천 연맹 목사들은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1933년 7월 교회의 요직을 두루 차지했다.
남미 해방신학과 한국 민중신학에 큰 영향 미쳐
당시 교회는 나치 정부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독일크리스천연맹, 히틀러에 반대하는 젊은 개혁자들, 중립적이거나 양측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목회자들, 이렇게 세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결국에는 국가와 동포를 파멸시킬 사람으로 예견하고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평소 좋아한 ‘너는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잠언 31장 8절)라는 성경구절처럼 시대가 아파할 때는 과감히 입을 열었다. 1933년 9월 6,000여 명의 목사가 결성한 ‘목사 비상동맹’과 ‘고백교회’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고백교회는 루터파, 개혁파, 연합교회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34년 5월 29일 개막된 제1차 전국회의에서 칼 바르트가 초안한 ‘바르멘 선언’을 5월 31일 승인·발표했다. 성서·신앙 중시, 정치적 목적 및 지도자 원리에 대한 교회의 불복종,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반대 등 6개항으로 된 선언이었다. 본회퍼는 1934년 8월 덴마크의 파뇌에서 개최된 세계교회연맹 회의에도 참석, 8월 28일 ‘교회와 열방의 세계’라는 제목의 평화설교를 통해 “내일 전쟁의 나팔이 울려 퍼질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라며 2차대전을 예고했다.
한편 고백교회 지도자들은 독일크리스천연맹이 모든 공식적인 신학교들을 장악한 상황에서 자체적으로 목회자를 길러낼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본회퍼에게 교장직을 의뢰했다. 본회퍼는 1935년 발트해 해변에 위치한 낡은 교회용 시설에서 23명의 학생을 상대로 신학교를 개설했다가 곧 핑켄발데(현재는 폴란드령)로 장소를 옮겨 고백교회 신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고백교회 신학교는 1935년 12월 “모든 목회자는 독일제국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히틀러의 훈령에 따라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그래도 체포와 투옥을 각오하고 한동안 운영되었으나 결국 1937년 9월 영구히 폐쇄되고 1937년 한 해 동안 800명이 넘는 고백교회 성직자가 체포되었다. 1938년 11월 9일 이른바 ‘수정의 밤’을 신호탄으로 나치가 본격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시작한 것도 본회퍼를 괴롭게 했다. 쌍둥이 여동생의 남편과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유대계였기 때문에 나치의 유대인 탄압은 그를 적극적 정치 저항운동으로 이끌었다.
“이것이 마지막이군요. 그러나 내게 이것은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유대인 정책에 반대하는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한 모임에서는 “미친 운전사가 인도로 차를 몰아 사람들이 죽어갈 때는 그 미친 운전사를 먼저 끌어내야 한다”라며 히틀러를 미친 운전사로 비유했다. 1939년 6월 지인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곧 혼자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독일로 돌아와 순교를 각오했다.
그 무렵 독일에서는 압베르(독일군 정보기관)의 책임자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과 그의 참모장 오스터 소장 등이 나치의 전복을 꾀하는 모종의 음모를 꾀하고 있었다. 법무부에 근무하는 본회퍼의 매형 한스 폰 도흐나니 변호사도 그 조직과 연계되어 있었다. 매형은 당시 히틀러가 저지른 죄악상을 ‘수치의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본회퍼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1939년 8월 압베르의 요원으로 이름을 올려놓은 덕분에 군 복무를 피하고 게슈타포의 감시에서 벗어났으며 비밀리에 유대인의 탈출을 도울 수 있었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2차대전을 일으키자 히틀러에 대한 암살 음모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본회퍼는 점점 약해지는 고백교회 운동에서 떠나 이 적극적인 정치적 저항운동에 가담했다. 히틀러 암살은 1943년 3월에만 두 차례 시도되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체포되었다. 형 클라우스와 2명의 매형도 투옥되었으며 압베르의 관련자들도 모두 체포되었다.
2년 동안 수감되어 있던 본회퍼는 독일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던 1945년 4월 9일 “이것이 마지막이군요. 그러나 내게 이것은 삶의 시작입니다”라는 마지막을 말을 남기고 총살되었다. 나머지 관련자도 모두 처형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히틀러는 자살하고 전쟁은 끝이 났다.
본회퍼가 강제수용소에서 친구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은 1953년 ‘옥중 서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옥중 서간’은 한국에서도 출간되어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었다. 본회퍼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 엘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와 함께 영국 성공회가 꼽은 20세기의 성자로 추앙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