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히틀러 생애에서 처음이자 단 한 번의 사랑은 조카딸
전쟁은 사실상 끝나 있었다. 히틀러(1889~1945)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베를린 총통 관저 지하실 벙커에서 최후의 반격을 외치며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군대를 지휘할 뿐이었다. 전장의 부하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격이었다. 마구 남발되는 명령은 지켜지지도 않고 지켜질 수도 없는 것들뿐이었다. 지하 12m의 벙커에서 히틀러는 흰머리와 떨리는 사지, 굽은 등의 모습으로 발을 질질 끌고 걸어다녔다. 면도는 빼먹기 일쑤였고 제복은 얼룩져 있었다. 눈은 충혈되고 입가에는 자주 침이 흘러내렸다.
15년 이상이나 히틀러의 정부였던 에바 브라운(1912~1945)이 이런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1945년 4월 15일이었다. 결혼과 죽음의 의식을 한꺼번에 치르기 위해 총통 관저를 찾아온 것이다. 히틀러가 23살이나 어린 에바 브라운을 처음 만난 것은 1929년이었다. 나치당의 전속 사진사가 뮌헨의 한 사진점에서 일하고 있는 브라운을 히틀러에게 소개한 것이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브라운의 아버지가 히틀러와의 교제를 반대하고 히틀러 역시 그의 생애에서 단 한 번의 정열적인 애정을 바쳤던 조카딸 겔리 라우발을 의식해 둘의 관계는 순탄하지 않았다.
라우발은 히틀러의 이복동생 안젤라의 딸이었다. 1928년 히틀러는 안젤라에게 뮌헨에 있는 자신의 살림을 돌봐줄 것을 요청했다. 안젤라는 20살의 딸 라우발과 함께 뮌헨으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틀러와 라우발이 공공장소에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둘의 관계를 두고 쑥덕거렸다. 성적 관계까지 갔는지는 확실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 히틀러는 라우발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히틀러의 생애에서 처음이자 단 한 번의 사랑이었다. 히틀러는 라우발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심하게 간섭했다. 1931년 9월 라우발이 유대인 음악가와 사랑에 빠져 히틀러의 곁을 떠나려고 했으나 히틀러는 라우발을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라우발은 9월 18일 히틀러가 없는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순수한 아리안 혈통으로 유전 질환 없음’ 선언하고 결혼 마쳐
그녀의 죽음 후 히틀러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다가 브라운과 본격적으로 만났다. 브라운은 우아한 여성이었다. 내성적이고 신중하며 품위도 있었다. 지나치리만큼 겸손했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않았다. 히틀러는 이처럼 모든 일에 조심성 있고 경망스럽지 않은 브라운을 마음의 안식처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공적인 자리에는 동행시키지 않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인 가운데 그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히틀러는 브라운이 그의 본영에 찾아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매일 전화를 걸어 위로해주었다. 브라운은 이런 자신의 현실을 불만스러워하면서 히틀러가 마련해준 산장에 틀어박혀 수영과 스키를 즐기거나 대중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소일했다. 아내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애매한 지위에 있다 보니 1932년과 1935년 두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브라운이 베를린에 도착하고 5일이 지난 4월 20일 히틀러가 가장 신뢰해온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와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베를린을 벗어나 도주했다. 히틀러는 분을 참지 못했으나 달리 방도가 없었다. 히틀러는 선전상 괴벨스에게 부인과 6남매를 자신이 있는 지하 방공호로 옮기도록 했다. 자신에게 충실한 괴벨스 가족만이라도 브라운과 함께 마지막까지 그의 옆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괴벨스가 배신하지 못하도록 묶어두기 위한 인질용이었다.
4월 25일 미군과 소련군이 엘베강 토르가우에서 감격의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탈출했던 괴링이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 또다시 부아를 돋우었다. ‘히틀러가 죽으면 괴링이 뒤를 잇고 또 총통이 통치 능력을 잃게 되면 괴링이 그 대리를 감당할 것’이라는 4년 전 총통 명령에 근거해 지하 벙커에 갇혀 있어 사실상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히틀러 대신 괴링 자신이 히틀러를 대리해도 되겠느냐를 묻는 편지였다. 히틀러는 괴링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어차피 지켜질 수 없는 명령이었다.
4월 28일 로이터통신의 한 뉴스가 히틀러를 또다시 분노케 했다. 힘러가 히틀러 대신 서부 독일군의 항복을 아이젠하워에게 제의했다는 보도였다. 이 소식은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평소 “충성이 아리안 게르만 친위대의 최고 강령”이라고 늘 입에 달고 살던 힘러였기에 그의 배신은 히틀러를 충격에 빠뜨렸다. 소련군은 어느덧 총통 관저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가와 있었다. 이런 현실은 히틀러에게 최후의 선택을 강요했다.
히틀러는 입속에 총을 쏘고, 브라운은 독약을 입에 넣어
히틀러는 4월 28일 자정,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다. 선전상 괴벨스와 비서 마르틴 보어가 증인이 된 이 결혼에서 두 사람은 ‘순수한 아리안 혈통으로 유전 질환 없음’을 선언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히틀러는 최후의 유언서를 써 여비서에게 건넸다. 유언장에는 독일 U보트 작전의 설계자 칼 데니츠 해군 제독을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씌어 있었다.
4월 29일 오후 외부 세계에서 방공호 속으로 또다시 우울한 뉴스가 전해졌다. 침략의 길동무였던 무솔리니가 그의 애인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는 뉴스였다. 히틀러는 모든 걸 체념했다. 먼저 자신의 애견 블론디에게 독약을 먹여 즉사시켰다. 4월 30일 아침 소련군이 이미 벙커 100m 전방까지 다가왔다는 보고를 받고 최후를 준비했다. 무솔리니의 시체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군중 앞에 공개된 것을 알고 자신도 그 꼴이 되는 게 싫어 부관에게 자신의 시체를 태워주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마지막 이별을 고한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한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두 번째 총소리는 없었다. 히틀러는 입속에 총을 쏘았고 브라운은 독약을 입에 넣었다. 1945년 4월 30일 월요일 오후 3시 30분이었다. 56번째 생일을 맞은 지 열흘 만이었고 독일의 총리가 되어 제3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12년 3개월이 흐른 뒤였다. 화장은 관저 뜰에서 집행되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곳을 향해 괴벨스는 오른손을 뻗어 나치스식의 고별 경례를 했다. 소련군의 집중적인 포화로 히틀러의 유골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