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교과서에 10편의 詩가 실렸던 ‘국민 시인’
“시의 정부(政府)”, “큰 시인을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 “그가 만지거나 느끼는 것은 모두 시”, “단군 이래 최고 시인”, “그의 시에 이르러 한국 현대시가 독자적인 시어를 가지게 되었다.” 도대체 이런 찬사를 받는 문인이 또 있을까. 서정주(1915~2000)는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노래한 서정시의 최고봉이자 문단의 큰 별이었다. 한때 교과서에 그의 시가 10편이나 실릴 정도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국민 시인’이었다.
서정주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이던 1930년 광주학생운동 1주년 기념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학교를 떠나야 했다. 1931년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했으나 그마저도 자퇴하는 등 학교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933년 가을 일본의 톨스토이주의자 하마다 다쓰오가 서울 도화동에 세운 빈민굴에서 잠시 넝마주이를 하는 등 방황기를 보내다가 박한영 대종사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박한영은 안암동 개운사 뒤 대원암에서 서정주에게 불교 경전을 가르치던 중 시인이 될 재목임을 간파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에 입학시켰다. 이때도 서정주는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서정주는 1935년 ‘시건설’지에 ‘스물 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로 널리 알려진 시 ‘자화상’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1936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고 그해 11월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등과 함께 창립한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향토적이고 본능적인 생명력을 노래하는 시 세계를 구축했다. 대표작 ‘화사’가 실린 것도 시인부락 2호였다. 그의 시 작업은 1930년대를 풍미한 김기림·이상 등의 모더니즘은 물론 1920년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적 경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고 선구적이었다.
“도대체 이런 찬사를 받는 문인이 또 있을까”
1941년 2월 10일 발간한 첫 시집 ‘화사집’은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을 원색적 언어로 토해내고 악마적 관능의 세계를 파고들었다”는 평가를 그에게 선사하며 ‘한국의 보들레르’란 별칭을 안겨주었다. 문학청년 윤동주가 밤새워 베꼈다는 ‘화사집’에는 표제시 ‘화사’를 비롯해 ‘자화상’ 등 모두 2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훗날 한 문인은 “미당이 만약 젊어서 요절했다면 ‘화사집’은 한국 문학 최대의 시집이 됐을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도 전 국민이 애송하는 시의 하나인 ‘국화 옆에서’는 1947년 11월 9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
해방 후 서정주는 극심한 좌우 대결 속에서 순수문학을 내걸고 당시 문단을 주도한 좌파의 조선문학가동맹과 맞섰다. 그의 시적 경향은 6·25 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 잡았고 이후 교과서에 다수 작품이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미쳤다.
서정주는 말년까지 숱한 명시를 남긴 영원한 현역 시인이었다. 첫 시집 ‘화사집’으로부터 시작해 ‘귀촉도’(1948), ‘서정주 시선’(1956), ‘신라초’(1961),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등을 거쳐 1997년 마지막이자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까지, 시집으로는 15권, 편수로는 미발표작까지 합쳐 1,000여 편의 시를 쓰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이 같은 다작은 국내에도 유례가 없고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있을 뿐이다.
서정주는 이렇게 시로 일가를 이뤘으나 틈만 나면 끝없이 새 길을 찾아 나섰다. ‘세계 문인 중에서 가장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임을 자처할 정도로 세계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고 70대 후반에는 러시아로 잠시 유학을 떠났다.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세계의 산 이름 1,625개를 매일 아침마다 외우기도 했다. 서정주는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된 한국문학 자료 중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갖고 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여러 번 추천되었다.
일제와 독재 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비판도 받아
“소설에 김동리, 시에 서정주”라는 격찬을 들었지만 그에게는 일제와 독재 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비판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1943년 9월 친일 성향의 출판사인 ‘인문사’에 들어가 친일색이 농후한 문학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도우며 모두 11편의 시, 수필, 소설, 종군기 등을 발표하고 1981년 2월에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 전두환을 지지하는 TV 연설을 했다.
서정주는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며 친일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참회했으나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서정주의 추천으로 등단하고 서정주를 ‘시의 정부’라고 치켜세우던 고은 역시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 “실존적 자아의식이나 근대적 역사 사고와는 동떨어져 있다”며 스승의 삶과 시를 총체적으로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착 정서로 쌓아올린 그의 시적 성취는 이러한 굴절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친일의 흠결을 덮고도 남을 만큼 좋은 시를 남겼다”며 존경을 바치는 문인도 많다. 2017년 완간한 ‘미당 서정주 전집’(전10권)의 한 편집위원은 “잠실운동장만 한 잔디밭에 잡초 몇 포기가 있다고 해서 그 잔디를 다 들어낼 수는 없지 않으냐”고 반문한다. 또 다른 편집위원은 “선생의 시적 언어는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전통의 고원을 높이 날기도 했고, 호랑이의 발톱을 달고 세상의 파란만장과 삶의 아이러니를 움켜쥐기도 했고, 온갖 고통과 시련을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고 말했다. ‘미당 서정주 전집’(전10권)에는 시 950편을 비롯해 시론·수필·여행기·평전·소설·희곡 등 시인이 남긴 원고 대부분이 망라되어 있다.
서정주는 2000년 12월 24일 사람들 가슴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워놓고 눈을 감았다. 평생을 오누이처럼 해로하던 부인이 저 세상으로 떠난지 2달여 만이었다. 소설가 이문구는 이렇게 조사(弔詞)를 낭독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예컨대 오답을 유도하거나 위답을 기대하는 뒤틀린 심사와 무엇이 다르겠나. 어여튼 한 잔 따라 올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