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2차대전 참전한 영국·프랑스 연합군 됭케르크 철수

‘아라스 전투’ 히틀러의 판단 흐리게 해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대전은 1940년 4월까지 전투다운 전투가 없어 한때는 ‘가짜 전쟁’으로까지 불렸다. 그러던 중 1940년 4월 9일 독일군이 노르웨이로 밀고 들어가면서 대살육전이 전개되었다. 독일군이 서부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것은 윈스턴 처칠이 영국의 총리로 취임한 5월 10일 새벽이었다. 독일군은 3개 방면군으로 나뉘어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를 공격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쪽을 공략하는 북쪽 루트(루트1), 아르덴 삼림지대를 뚫는 중앙 루트(루트2), 마지노선을 지나는 남쪽 루트(루트3) 이렇게 세 갈래였다.

전쟁의 초기 향방은 상식을 뛰어넘는 전격전으로 아르덴 삼림지대의 험한 지형을 돌파한 A방면군(루트2) 소속의 기갑사단이 5월 20일 솜강 남쪽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일부 분견대가 영불해협에까지 도달함으로써 사실상 결정되었다. 문제는 후속 보병부대의 진격이 너무 느렸다는 데 있었다. 히틀러와 수뇌부는 독일군 기갑부대의 지나치게 빠른 진격 속도와 넓어진 전선 확장을 우려했다. 독일군 수뇌부의 의지를 결정적으로 약화시킨 ‘아라스 전투’가 벌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아라스 전투는 에르빈 롬멜의 제7기갑사단 등이 아라스로 전진하던 중 영국군 2개 보병대대, 2개 전차대대 규모와 접전을 벌인 전투로 규모는 크지 않았다. 총 74대의 마틸다 전차로 구성된 영국의 2개 전차대대는 5월 21일 독일군의 대규모 전차부대에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독일군 기갑부대가 곧 마틸다 전차를 무력화하고 영국군을 아라스 방향으로 물러나게 함으로써 전투는 종료되었다.

그런데 이날 하루 동안 벌어진 아라스 전투에서 독일의 제7기갑사단은 89명 전사, 116명 부상, 173명 실종 등 그때까지 서부전선에서 벌어진 전투 이래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 롬멜조차 영국군이 4개 대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단급 부대의 맹반격을 받았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A방면군 지도부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강력한 전차를 앞세워 사단급으로 반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전선이 길어져 가뜩이나 불안해하던 독일군 수뇌부에 아라스 전투는 포위망 내의 연합군 전투력이 아직 상당한 수준이라는 판단 착오를 불러일으키고 히틀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히틀러, 갑자기 ‘기갑부대는 진격하지 말고 작전 경계선 준수하라’ 명령 내려

그 무렵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는 영국군은 전선에서 이탈해 해상으로 철수한다는 이른바 ‘발전기(다이너모) 작전’을 준비했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영불해협의 주요 항구인 됭케르크를 해상 탈출의 거점으로 삼겠다는 구상이었다. 영국은 됭케르크를 표적으로 한 독일군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불로뉴와 칼레 등 다른 지역으로 병력을 증원했다.

한편 독일군의 A방면군 기갑사단을 총지휘하는 폰 클라이스트는 예하 기갑사단의 피해가 자꾸 늘어나는 것에 불안을 느꼈다. 막무가내로 진격만 하다가는 포위망을 좁히더라도 전투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이런 우려를 A방면군 총사령관 폰 룬트슈테트에게 보고했다. 폰 룬트슈테트는 5월 23일 밤 A방면군 예하 부대에 진격 중단 명령을 하달하고 24일 아침 히틀러를 만나 진격 중단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무렵 히틀러의 머릿속에는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의 주장도 입력되어 있었다. 프랑스 전역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진 마당에 이런 식으로 전쟁이 끝나면 대부분의 전공이 육군의 몫이 될 것을 우려한 괴링이 “독일군 기갑부대가 피해를 볼지 모르니 마무리는 공군에 맡겨 달라”고 히틀러를 설득한 것이다.

이처럼 육군에서는 폰 룬트슈테트 A방면군 총사령관이 진격 중단을 요청하고, 공군에서는 괴링이 의욕적으로 나서자 히틀러가 5월 24일 새로운 명령을 발령했다. A방면군 소속의 독일군 기갑부대는 다음 공격에 필요한 교두보 이외에는 더 이상 진격하지 말고 공군의 작전이 방해받지 않도록 작전 경계선을 준수하라는 명령이었다. 폰 룬트슈테트 사령관에게는 육군 총사령부(OKH)의 명령에 상관없이 스스로 판단해 공격을 재개하거나 정지할 것을 결정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부여했다. 이 명령은 독일군 제1기갑사단이 됭케르크 서쪽 20㎞ 밖까지 접근한 상황에서 영국에 ‘됭케르크의 기적’을 선물한 최악의 결정이었다.

육군 총사령부가 히틀러의 명령에 강하게 반발했으나 히틀러는 자신의 뜻을 철회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이때 육군 총사령부의 반발을 묵살한 것은 히틀러의 전쟁 지휘권에도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즉 당시까지 히틀러는 육군 총사령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육군 총사령부를 통하지 않고 예하 부대인 A방면군 총사령관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고 재량권을 부여하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지휘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군의 괴링에게 기회를 준 것도 육군 총사령부의 주장에 마냥 끌려다닐 수 없다는 히틀러의 복심이 반영된 결과였다.

 

전쟁 중에는 됭케르크 철수 중요성 깨닫지 못해

독일군 수뇌부의 판단에 변화가 생긴 것은 이틀이 지나서였다. 괴링이 호언장담한 공군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됭케르크에서 연합군의 조직적인 철수 움직임이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됭케르크를 통한 철수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5월 26일 폰 클라이스트 기갑 사령관에게 제한적인 전진을 승인했다. 독일군은 5월 27일 공격을 재개했다. 그런데 승리를 거의 움켜쥐었다는 생각이었는지 필사적인 공격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승리를 주워 담는 듯 가볍게 공격했다.

연합군은 5월 27일부터 본격적으로 철수작전을 전개했다. 됭케르크에서 첫 날 배에 오른 병사는 7,669명이었다. 이후 영국의 공군 전투기들이 상공에서 독일의 공군 전투기들과 공중전을 벌이는 동안 구축함, 여객선, 거룻배, 범선 등으로 이뤄진 1,200여 척의 잡동사니 함대가 수십만 명의 연합군을 영국 해안으로 실어날랐다. 바다 곳곳에는 독일 해군을 막기 위해 영국이 설치한 기뢰가 도사리고 있어 항해 장치가 열악한 민간 선박들은 선두에 선 구축함만 믿고 따라갔다. 영국의 도버에서 됭케르크까지는 약 72㎞지만 선박들은 기뢰를 피해 100㎞ 넘게 돌아가기도 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6월 4일까지 9일간 실시된 됭케르크 철수 작전에서 연합군의 피해는 컸다. 272척이 침몰하고, 177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차량, 전차, 야포 등 최신 무기들도 고스란히 독일군에게 넘어갔다. 해안가에 남아있던 프랑스군 수만 명은 포로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영국 원정군 19만 명, 프랑스군 14만 명 등 모두 33만 8,226명, 그리고 8만 5,000대의 차량이 무사히 영국으로 빠져나갔다.

오늘날 일부 군사 전문가들은 연합군이 됭케르크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다면 히틀러가 영국 본토를 공격할 때 영국이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을 것이고 1944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됭케르크 철수 후에도 독일은 너 나 할 것 없이 프랑스를 상대로 한 대승의 전공 차지에 바빴기 때문에 됭케르크 철수가 갖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당시 결정에 대한 후회가 나오고 히틀러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한 것은 전세가 연합군 측에 기울고 나서부터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 장군들 중에는 “독일은 히틀러가 진격 중지 명령을 내린 5월 24일에 사실상 전쟁에 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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