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내성 추리소설 ‘마인’ 조선일보 연재… 한국 추리소설의 본격적인 출발점

우리나라 첫 추리소설은 이해조의 ‘쌍옥적’(1908년)

세계 최초의 추리소설은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가 ‘그레이엄 매거진’ 1841년 4월호에 발표한 ‘모르그 가의 살인’이다. 이후 추리소설은 유럽의 모리스 르블랑, 코넌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에 의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우리나라 첫 추리소설은 1908년 이해조가 ‘정탐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쌍옥적’이다. 제국신문에 49회(1908.12.4∼1909.2.12) 연재되고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쌍옥적’이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로 불리는 이유는 초자연적인 방식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를 이용해 근대적 경찰의 전신인 순검이 사건을 수사한다는 추리소설적인 구성을 갖추고 ‘정탐소설’이라는 분명한 장르 의식을 기반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다만 근대 계몽기의 다른 신소설들처럼 우연의 남발과 권선징악이라는 전근대적 요소의 흔적이 뚜렷해 완전한 추리소설로 분류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추리소설이 조금씩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중반부터다. 아동문학의 선구자인 방정환이 북극성이란 필명으로 ‘동생을 찾으러’(1925)와 ‘칠칠단의 비밀’(1926)을 발표하고 박병호가 1926년 ‘혈가사’를 발표했다. 1931년에는 최독견이 신민일보에 ‘사형수’를, 1934년에는 채만식이 서동산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에 ‘염마’를 선보였다.

하지만 문학평론가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추리소설가로 꼽는 것은 김내성(1909-1957)이다. 김내성은 1930년대부터 1974년 김성종이 ‘최후의 증인’을 발표할 때까지 우리 문단에서 독보적인 추리작가로 인정받은 “한국 추리소설의 아버지”이다.

김내성은 평남 대동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31년 4월 와세다대 부속 제2고등학원 문과를 거쳐 와세다대 독문학과에 입학했다가 1933년 독법학과로 전공을 바꿨다. 하지만 법학보다는 문학에 심취해 서구의 고전 명작을 두루 섭렵했다. 특히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심리 탐구에 관심이 많아 추리소설 전문지를 탐독했다. 일본의 유명 탐정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의 격려와 후원도 그를 고무했다. 에도가와는 에드거 앨런 포를 존경해 그의 이름을 빌려 필명으로 사용한 일본 추리소설의 개척자다.

 

독보적 추리작가로 인정 받은 “한국 추리소설의 아버지”

김내성은 일본의 추리소설 전문지 ‘프로필’에 ‘타원형의 거울’을 투고해 1935년 3월 가작에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같은 잡지에 투고한 ‘탐정소설가의 살인’과 대중잡지인 ‘모던 일본’에 투고한 ‘연문기담’도 잇달아 당선되어 추리소설계의 신진 작가로 떠올랐다. 당시 김내성은 ‘유불란’이란 필명을 썼다. ‘괴도 뤼팽’ 시리즈로 유명한 프랑스의 추리소설가 모리스 르블랑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유불란은 이후 작품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도 사용되어 한국 최초의 명탐정 캐릭터로 널리 알려졌다. 서양식 모자와 안경, 칠흑 같은 단장은 필수품이었고 동양인을 드러내는 ‘빛나는 검은 눈동자’의 소유자였다. 유불란이 풀어가는 수수께끼와 논리적 추론 내지 반전을 씨줄과 날줄로 엮은 소설작법은 이전의 한국문학이 체득하지 못한 방정식이었다. ‘타원형의 거울’은 추리적 완성도를 갖췄다는 점에서 한국 추리소설의 효시로 꼽히지만 일본의 추리소설 전문지 공모에 당선되고 일본어로 된 작품이라는 결함 때문에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시원으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

김내성은 1936년 3월 대학 졸업 후 귀국하고 일본에서 당선된 ‘탐정소설가의 살인’을 ‘가상범인’이라는 제목의 한국어로 번역해 조선일보에 투고했다. ‘가상범인’이 조선일보에 연재(1937.2.13∼3.21)된 후 김내성은 한국 문단 최초의 추리소설 전문 작가로 인식되었다. 1937년 6월부터 1938년 5월까지는 조선일보 자매지인 ‘소년’지에 어린이들을 위한 장편 추리소설 ‘백가면’을 연재하고 1938년 6월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백가면’은 한국 추리소설 사상 처음으로 명탐정의 캐릭터인 유불란을 처음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추리문학사적 의미가 있다. 유불란은 이후에도 장편 추리소설 ‘마인’과 후속작인 ‘태풍’에도 등장해 활약을 펼쳤다. 일본어로 발표된 ‘타원형의 얼굴’은 1938년 3월부터 5월까지 조선일보 자매 월간지인 ‘조광’지에 ‘살인예술가’란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해방 후에는 대중소설 집필하고 라디오 드라마 작가로 활동

김내성은 조선일보에 탐정소설을 연재한 것을 계기로 1938년 12월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후 낮에는 조선일보 자매지인 ‘조광’을 편집하고 밤에는 탐정소설을 집필했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이 김내성을 독보적인 탐정소설가로 자리잡게 해준 장편 추리소설 ‘마인’이다. 김내성의 대표작이자 한국 추리소설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인정받는 ‘마인’은 독자의 열렬한 성원을 받으며 조선일보에 171회(1939.2.14~10.11) 연재되었다. 단행본은 1939년 12월 출간되어 해방될 때까지 5년 동안 18쇄를 돌파했다.

김내성은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화신백화점에 입사했다. 여전히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장편 추리소설 ‘태풍’(1942)을 썼다. 그러다가 건강이 악화하자 1945년 처가가 있는 함경남도 안변에서 요양하며 일제 말기 청춘 남녀의 애정과 독립 투쟁을 그린 새 장편소설 ‘청춘극장’을 구상했다. 김내성이 200자 원고지 300장 분량의 초반부를 집필했을 때 일본이 패망했다.

해방이 되자 김내성은 탐정소설에서 벗어나 대중소설을 집필하고 라디오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했다. 1946년 7월부터 방송된 한국 최초의 어린이 드라마이자 장편 라디오 연속극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똘똘이의 모험’의 기획·극본을 맡았다. ‘똘똘이의 모험’은 치솟는 인기에 힘입어 1946년 9월 영화로도 제작되어 2주일 동안 15만 명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고 1946년 11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일제 때 쓰기 시작한 ‘청춘극장’은 1949년 ‘태양신문’에 연재되고 1949년 12월, 1부(청춘의 전설)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치솟는 인기 덕에 1950년 2월과 4월에도 각각 2부(사랑의 생리)와 3부(민족의 비극)를 단행본으로 펴냈다. 4부를 연재하고 있던 1950년 6월 6·25 전쟁이 터져 연재가 중단되었다.

 

순수문학이 지배하는 우리 문단에서 문학적 조명 거의 받지 못해

김내성은 피란지 부산에서 ‘청춘극장’ 연재를 계속 이어갔다. 1951년 9월, 4부(폭풍의 역사)를 출간하고 1952년 3월 연재를 완성함으로써 7년에 걸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마지막 5부(대지의 심판) 완간에 맞추어 1952년 4월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성대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김내성은 ‘청춘극장’을 연재하면서도 장편소설 ‘인생화보’를 1951년 평화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해 1953년 전 3부로 된 단행본을 출간했다.

1954년에도 3편의 장편소설 ‘백조의 곡’, ‘사상의 장미’, ‘애인’을 동시에 연재함으로써 추리소설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대중적인 신문 연재소설 작가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사상의 장미’는 1936년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어로 쓴 첫 장편소설이었으나 출간이 무산되어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다가 18년이 지나 한국어로 연재되고 그 후 다시 60년이 지나 2014년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간되는 기이한 운명의 소설이다.

김내성은 1956년 6월부터 ‘실락원의 별’을 경향신문에 연재해 큰 인기를 끌었으나 1957년 2월 19일 뇌일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중단되었다. 완성하지 못한 후반부는 당시 이화여대 피아노과에 재학 중이던 장녀가 아버지의 창작 노트를 바탕으로 완성해 1957년 7월 전 2권으로 출간되었다.

김내성의 소설은 발표되는 대로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의 작품 중 영화로 제작된 것은 18편, 라디오와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제작된 것은 12편이나 된다.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된 작품은 ‘똘똘이의 모험’(1946), ‘애인’(1956), ‘마인’(1957), ‘실락원의 별’(1957), ‘인생 화보’(1957), ‘청춘극장’(1959), ‘진주탑’(1960), ‘쌍무지개 뜨는 언덕’(1965), ‘암굴왕’(1968) 등이 있다. 이 중 ‘청춘극장’은 영화로 3번, TV 드라마로 2번 제작되었으며 ‘인생 화보’는 영화로 2번, TV 드라마로 3번 제작되었다. 그런데도 문학적 조명은 거의 받지 못했다. 대중문학으로 분류되다 보니 순수문학이라는 아성이 지배하는 우리 문단이 작품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8년 경향신문이 주관하는 ‘내성문학상’이 제정되어 소설가 정한숙(1958), 유호(1959), 박경리(1960)가 수상자로 발표되었으나 아쉽게도 3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김내성의 이름을 건 문학상이 다시 부활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다. 계간지 ‘추리문학’이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제정·공모했지만 이 문학상 역시 3회로 그쳐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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