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독일 베를린 올림픽 개막

히틀러가 유대인 제명하자 국제적으로 올림픽 보이콧 움직임 확산

베를린 올림픽은 1931년 4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유치가 결정되었다. 독일 정부는 “1차대전의 상흔을 말끔히 씻어내고 전후 복구를 마무리했으니 전 세계인들에게 우리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국가 차원의 총력 준비를 약속했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으나 엉뚱한 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1933년 1월 집권한 히틀러가 유대인과 집시 등의 참가를 배제하는 등 올림픽 경기를 인종주의와 국수주의의 선전장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그동안 두각을 나타내던 유대계 독일인 선수들이 독일스포츠협회에서 제명되었다. 여자 높이뛰기 독일 기록 보유자인 그레텔 베르크만, 여자 펜싱 선수 헬레네 마이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자 히틀러의 강제수용소 설치, 반유대주의 정책 등을 문제 삼아 대회를 보이콧하자는 목소리가 각국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했다. 각국 유대인 선수들도 올림픽 불참을 선언했다. 일부에서는 베를린 올림픽을 대체하는 다른 대회를 열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국제적으로 올림픽 보이콧 움직임이 서서히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히틀러는 “유대인을 비롯한 모든 인종의 올림픽 참가를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대인 선수도 다른 올림픽 출전 후보자들과 똑같이 대우하겠다며 귀국을 유도했다. 그래도 베르크만이 독일로 돌아오지 않자 가족을 동원해 귀국을 강요했다.

결국 베르크만은 독일로 돌아왔고 그를 포함해 여러 명의 유대인이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에 참가했다. 하지만 심리적인 위축과 불공평한 분위기 등으로 베르크만을 제외하고 모두 선발전을 통과하지 못했다. 베르크만은 올림픽이 열리기 한 달 전인 1936년 6월 말 높이뛰기에서 1.60m을 기록해 독일 최고 기록을 세웠다.

독일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계 독일인이자 1928년 올림픽 펜싱 종목 우승자 헬레네 마이어에게는 별도의 선발전을 치르지 않고 올림픽 출전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이어는 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화답했다. 미국의 올림픽위원회도 1935년 12월 에이버리 브런디지 위원장의 주도로 진행된 표결에서 과반수의 찬성으로 올림픽 참가를 결정했다. 결국 다른 나라들이 동참하면서 보이콧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각국 선수단이 배와 기차로 독일을 향해 이동하고 있을 때 그들을 분노하게 하는 일이 또 다시 벌어졌다. 올림픽이 열리기 2주 전, 베르크만의 기록이 굴곡이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독일 올림픽위원회가 출전 선수 명단에서 제외한 것이다. 독일 스포츠협회는 베르크만 대신 도라 라트엔을 출전시켰다. 라트엔은 올림픽 여자 높이뛰기에서 4위에 오르는 부진한 성적을 거뒀으나 1938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는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20년 뒤 “나는 남성인데도 나치의 강요에 의해 여장을 하고 올림픽에 출전했다”고 밝혀 충격을 주었다.

올림픽 출전 꿈이 좌절된 베르크만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1937년과 1938년 미국 육상선수권대회에서 우승, 독일 체육계의 결정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마이어는 베를린 올림픽 여자 펜싱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독일인 얼굴에 벅찬 감동 넘쳐흘러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은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36년 8월 1일 오후 4시 개막했다. 49개국 3,963명이 참가한 대회에서 독일 선수단은 348명으로 최대 규모였다. 미국은 18명의 흑인을 포함해 312명, 일본은 217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개막식은 10만 명의 군중이 하켄크로이츠 휘장으로 뒤덮인 세계 최대의 베를린 경기장에 운집한 가운데 조직위원장의 환영사와 히틀러의 개회사 선언 후 축포가 울리고 2만 마리의 비둘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절정에 달했다. 뒤이어 당대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지휘한 ‘올림픽 찬가’에 맞춰 1,000여 명의 합창단이 큰 목소리로 합창을 하고 나치 돌격대 수천 명이 베를린 경기장 안을 거위걸음으로 행진했다.

성화는 올림픽 발상지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근대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고대 그리스 방식 그대로 태양과 오목 거울을 이용해 채화되어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 7개국 3,075km를 달려 제1회 아테네 올림픽(1896) 마라톤 우승자 루이스에 의해 점화되었다. 성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 7월 암스테르담 올림픽 때였으나 그리스에서 채화되어 릴레이를 거쳐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이어지는 성화 봉송은 베를린 올림픽이 처음이었다. 성화는 1948년 런던 올림픽 때까지 ‘올림픽의 불’로 불리다가 1950년 ‘성화’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올림픽을 맞는 독일인들의 얼굴에는 올림픽이 자국에서 열린다는 자부심 이상의 벅찬 감동이 넘쳐흘렀다. 20년 전인 1916년 베를린에서 치러질 예정이던 올림픽이 1차대전의 발발로 불발되고 1920년(벨기에 안트베르펜)과 1924년(프랑스 파리) 올림픽에는 1차대전에 대한 책임으로 참가 자체가 원천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올림픽과의 악연은 베를린 올림픽 이후의 일본도 비슷했다. 1940년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릴 예정이었으나 2차대전 발발로 무산되고 1944년 올림픽은 전쟁으로 올림픽이 열리지 않았다. 1948년의 런던 올림픽에는 역시 전범 국가인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초청을 받지 못했다. 1964년이 되어서야 실로 24년 만에 도쿄 올림픽을 개최했다.

 

올림픽 성공 히틀러 지지로 이어져

개막식이 한창일 때 한쪽에서는 레니 리펜슈탈이 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를 찍느라 분주했다. 리펜슈탈은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알리고 파시즘의 도도한 흐름을 전파하기 위해 16일간의 대회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대회는 올림픽 사상 처음 TV로 중계되었다. 베를린 시내 곳곳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일반 시민들이 경기 장면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베를린 올림픽이 처음이었다.

각국 선수들은 8월 16일 폐막 때까지 19개 종목에서 열띤 경쟁을 벌였다. 농구, 카누, 핸드볼이 처음 종목으로 채택되고 폴로가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올림픽에서 사라졌다. 히틀러는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 대회를 개최했지만 열등한 인종이어야 할 미국의 흑인 선수 제시 오언스가 육상 부문 4관왕에 올라 히틀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독일 선수들은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89개의 메달(금메달 33개)을 목에 걸어 56개의 메달(금메달 24개)을 딴 미국을 제치고 사상 처음 1위에 오른 것이다. 일본 선수단 중에는 마라톤 2명, 농구 3명, 축구 1명, 복싱 1명 등 7명의 한국 선수도 있었다. 일본은 손기정(금메달)과 남승룡(동메달)을 포함해 18개(금메달 6개) 메달로 8위에 올라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데 활용했다.

베를린 올림픽은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경기 운영과 시설·장비면에서 역대 어느 대회보다 혁신적인 대회로 평가받았다. 독일 경제도 살아났다. 스타디움, 야외극장, 체육관, 숙박 시설 등 주요 시설들의 건설을 시작으로 도로, 철도, 고속도로(아우토반) 등의 대공사가 본격화하면서 1933년 600만 명이던 실업자는 1936년 1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올림픽의 경제 효과는 그대로 히틀러 지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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