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가슴을 정감 있고 구슬픈 노래로 달래준 대작곡가
박시춘(1913~1996)은 한국 가요계의 큰 별이자 격변기마다 대중의 가슴을 정감 있고 구슬픈 노래로 달래준 대작곡가였다. 그가 작곡한 3,000여 곡은 근대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자 근간이 되었으며 민초들에게는 힘을 북돋아주는 응원가로 전해졌다.
박시춘(본명 박순동)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권번(가무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곳)을 운영하는 아버지 덕에 풍족한 생활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10대 시절 부친의 작고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이동 악극단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녀야 했다. 20살 때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중앙음악학원에서 체계적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귀국 후 서울의 시에론레코드사에 입사하고 1935년 8월 ‘희망의 노래’를 발표함으로써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희망의 노래’ 작사가인 홍개명은 훗날 ‘언제나 봄’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박시춘이라는 예명을 지어주었다.
박시춘에게 비로소 명성을 안겨준 곡은 남인수가 불러 유명해진 ‘애수의 소야곡’이다. 이 곡을 완성하기 전, 박시춘은 자신이 작곡한 ‘눈물의 해협’을 시에론레코드사 소속의 남인수에게 가르쳐 1936년 7월 음반을 취입했으나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박시춘은 ‘눈물의 해협’이 실패하자 작곡에서 손을 떼고 ‘낭랑좌극단’의 밴드 마스터로 전국을 유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OK레코드로부터 전속계약을 맺자는 연락이 왔다. 소속을 옮긴 박시춘은 ‘눈물의 해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곡은 그대로 살리되 가사는 이부풍이 좀 더 구슬픈 내용으로 다시 쓰게 해 ‘애수의 소야곡’을 완성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으로 시작하는 ‘애수의 소야곡’은 1937년 12월 다시 남인수의 목소리에 실려 발표되었고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이후 남인수는 이난영 등과 함께 가요계 최고 스타로 부상하고 박시춘과 남인수는 일제강점기 한국 가요사의 명콤비가 되었다. 1938년에는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로 시작하는 ‘왕서방 연서’를 작곡해 노래를 부른 김정구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이처럼 그는 대중을 웃기고 울린 대중의 벗이었으나 일제 말기에 ‘감격시대’(1939), ‘결사대의 아내’(1941), ‘아들의 혈서’(1942) 등 친일 가요를 작곡해 오점을 남겼다. ‘감격시대’는 친일 가요였는데도 해방 후 오랫동안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광복절 때마다 방송국이 ‘감격시대’를 방송하는 해프닝을 빚었다.
걸작 중 상당수는 6·25 전쟁 와중에서 나와
해방 후 박시춘은 분단의 비극을 노래한 첫 작품으로 평가되는 ‘가거라 38선’(1946)을 발표하고 작사가 유호와 콤비를 이뤘다. 박시춘이 서울중앙방송국 초대 경음악단장으로 활동하고 유호가 같은 방송국에서 라디오 드라마를 쓰면서 시작된 인연은 1946년 건전 가요 ‘목장의 노래’, ‘하이킹의 노래’ 등에서 첫 결실을 보았다.
현인이 불러 유명해진 ‘신라의 달밤’도 두 콤비의 첫 대표작이었다. 현인은 1947년 초, 영화 ‘자유 만세’가 상영되는 명동 국제극장(1947.12 시공관으로 개칭)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 ‘신라의 달밤’을 처음 불렀다.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창법, 회고조의 가사, 이국 취미를 자극하는 가락으로 그날 하루에만 9번이나 앙코르 요청을 받을 정도로 삽시간에 대중을 사로잡았다. 사실 ‘신라의 달밤’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노래로 원곡의 제목은 ‘인도의 달밤’이었다. 무대에서만 불리던 노래가 광복 후 작사가 유호를 통해 제목과 노랫말을 바꾼 뒤 신라를 배경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신라의 달밤’을 발표할 즈음 박시춘은 직접 럭키레코드를 설립했다. 그후 럭키레코드는 박시춘·유호 콤비가 작곡·작사한 ‘비나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낭랑 18세’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박시춘의 걸작 중 상당수는 6·25 전쟁 와중에서 나왔다. 국방부 정훈장교로 종군하면서 예술혼을 불태운 박시춘의 눈에 비친 동족상잔의 비극과 전쟁의 시름은 고스란히 오선지 위에 옮겨졌다. 그중 대표곡이 서울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어느 날 박시춘·유호 콤비가 밤새 통음하면서 만든 진중가요 ‘전우여 잘 자라’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육군 제1훈련소가를 비롯해 1·4 후퇴 때 군인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만들어진 ‘전선야곡’(1951), 1?4 후퇴의 비극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1951), 부산을 떠나면서 작곡한 ‘이별의 부산 정거장’(1954) 등을 통해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기라성 같은 가수를 길러낸 가요계의 아버지
박시춘은 1953년 작곡한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로도 백설희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백설희는 이후 박시춘이 작곡한 ‘물새 우는 강 언덕’,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청포도 피는 밤’ 등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시키며 1950년대 최고의 여가수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박시춘은 남인수, 김정구, 현인, 백설희 등 기라성 같은 가수를 길러낸 가요계의 아버지였으면서도 “나는 일생 동안 선생도 없고 제자도 없다”며 제자들을 마다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박시춘은 1958년 오향영화사를 설립해 ‘딸 칠형제’를 감독하고 ‘가는 봄 오는 봄’, ‘청춘 쌍곡선’, ‘오부자’ 등의 영화를 직접 제작하는 등 영화에도 관심을 쏟았다. 특히 오향영화사는 제작하는 영화마다 주제가를 삽입해 영화음악의 또 다른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박시춘은 1963년 10월 창립된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 한국가요작가동지회장 등 음악 활동 외에도 연예계의 권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7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음악저작권협회와 한국가요작가협회 등을 이끌며 대중음악인들의 권익 보호 활동에 앞장섰다. 1982년 10월 대중가요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의 노래들은 1990년대까지 한국인이 좋아하는 ‘한국인의 애창 가요’를 뽑을 때마다 여러 곡이 포함될 정도로 한국인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KBS TV ‘가요무대’가 800회 기념으로 펴낸 ‘가요무대 100선집’에는 그의 노래가 15곡이나 수록되었고 1980년대에 MBC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20선’에도 6곡이 포함되었다.
‘비 내리는 고모령(1991, 대구)’, ‘서귀포 칠십리(1997, 서귀포)’, ‘신라의 달밤(2000, 경주)’, ‘고향초(2000, 경남 고성)’, ‘애수의 소야곡(2001, 진주)’, ‘굳세어라 금순아(2003, 부산 영도)’, ‘임 계신 전선(2007, 인천 강화)’ 등 노래비도 전국 각지에 건립되고 2002년에는 경남 밀양에 생가가 복원되어 대중가요에 끼친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