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이병도 ‘진단학회’ 결성 주도

“존재하지도 않은 사실을 과장되게 기록하는 것은 잘못”

이병도(1896~1989)는 우리나라 최초로 과학적인 방법론과 철저한 고증을 중시한 사학자다. 우리 역사의 과학적, 실증적, 종합적 규명과 체계화를 위해 지리학, 고고학, 사회학, 인류학, 민속학, 언어학 등 모든 연관 학문을 역사 연구에 적용한 우리나라 근대 사학계의 태두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가 11세 때인 1907년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중동학교를 거쳐 1915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했으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깊어 그해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와세다대 문학부에 입학할 때만 해도 서양사를 전공할 계획이었으나 당시 ‘일본의 국보’로 불리던 요시다 도고가 24세 때 썼다는 ‘일한고사단’을 읽고 한국사를 공부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1919년 가을 와세다대를 졸업하고 귀국 후에는 중앙학교 교원으로 역사와 지리, 영어를 가르쳤으며 1920년 7월 창간호를 낸 ‘폐허’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던 중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설립되자 “학문을 연구하려면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하는 것이 좋겠다”는 도쿄대 한 교수의 권유를 받았다. 이병도는 무엇보다 당시 일본인들만 접근할 수 있는 규장각 사료 등을 섭렵하고 싶어 1925년 8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들어가 4년간 활동했다.

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교토제국대 교수를 거쳐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한 이마니시 류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를 맡아 연구했다. 하지만 막상 고대사 연구에 손을 대니 너무 많은 문제가 앞을 가로막았다. 특히 한사군과 삼한 문제는 거의 미해결의 황무지 상태였다. 당시 조선사편수회는 단군에 대한 고기록이 너무 단편적이거나 설화적인 요소가 많고, 후세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에서 지우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사료가 확실치 않다는 이유로 한국사의 고대사를 왜곡하려 한 것이다.

 

모든 연관 학문을 역사 연구에 적용한 근대 사학계의 태두

이병도는 일본의 어용 사학자들과 달리 문헌이 믿기 어려우면 그것이 왜 믿기 어려운지 그 본원을 찾아 문헌을 복원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근간을 바로잡으려고 했다. 그 결과 고조선 시대의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모두 순수한 우리 겨레의 핏줄이 건국하고 우리 민족을 다스린 왕조임을 밝혀냈다. 1928년 12월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최남선도 일본인 어용 사학자들의 고조선 말살 기도를 집요하게 따졌다.

하지만 조선사편수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삭제하는 등 통일신라 이전의 우리 역사를 지워버린 채 1932년 3월 조선사 전 6편(35책) 중 1편(삼국 이전)과 2편(통일신라)을 발간했다.

이병도는 1929년 조선사편수회 생활을 끝내고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1933~1946)와 이화여전 강사(1941~1943) 등을 역임하며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1930년 5월에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친일 학술단체 청구학회의 ’청구학총‘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청구학총에 게재된 이병도의 한사군 관련 논문들은 종래의 학설을 뒤집어 학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1934년 5월 7일 소공동의 한 다방으로 한국의 언어, 문학, 역사, 민속, 미술을 연구하는 20여 명의 학자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병도의 제안에 따라 자신들의 모임을 ‘진단학회’라고 정하고 24명의 발기인 중 이병도를 비롯해 이윤재, 이희승, 손진태, 조윤제 등 6명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했다. ‘진단’의 ‘진(震)’은 중국의 동쪽, ‘단(檀)’은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단군을 뜻한다.

이병도는 1934년 11월 28일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학술지 ‘진단학보’의 편찬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진단학보는 국문으로 된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지로 일제에 대한 학문적·문화적 저항의 뜻을 함축했다. 계간으로 발행된 진단학보 첫 호는 이윤재의 주도로 만들어졌으나 적자 폭이 커 첫 호만 내고 손을 떼자 이후 이병도가 도맡아 했다. 이병도는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김성수·김연수 형제, 윤치호, 최규동 등으로부터 받은 찬조금과 자신의 사재를 털어 2호부터 본인이 냈다.

원고 작성, 정리, 편집, 조판, 교열까지 혼자 동분서주하며 만든 진단학보는 일본과 중국은 물론 미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등에도 배포되고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아시아 학보’에도 소개되었다. 하지만 결국 이병도도 힘에 부쳐 1941년 6월 14호를 끝으로 자진 폐간했다. 일제 말기 이병도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해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다.

 

“학문은 냉엄·정확·과학적이어야 한다”

이병도는 해방 후 진단학회를 부활시키고 국어·국사 교육을 담당할 6개월 과정의 ‘임시 중등교원 양성소’를 개설해 교원을 배출하는 한편 우리말로 된 최초의 역사책 ‘국사 교본’을 편찬·보급함으로써 일제에 의해 단절된 국사 교육의 맥을 이었다.

이병도의 학문은 광복 후 만개했다. ‘조선사 대관’(1948)은 대표적인 저서로 훗날 ‘국사 대관’(1954)으로 증보되어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25전쟁 환도 후에는 미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진단학회와 함께 한국사 발간에 착수, 1959년 6월 1일 ‘한국사’ 전 7권을 간행했다.

말년에도 학문에 정진, ‘한국 고대사 연구’(1976), ‘고려시대 연구’(1980)를 발간했으며 필생의 작업으로 시작했던 ‘한국 유학사’(1988)를 출간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해 미국 역사학회가 중국의 호적 박사에 이어 동양인으로는 두 번째 명예회원으로 선정했으며 미 프린스턴대가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70년~1980년대 들어 이병도의 실증사학은 식민사관이라는 이름 아래 젊은 학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국사학계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서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 사관이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철저한 실증론에 입각한 이병도의 학문적 방법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민족주의 사학을 연구하는 젊은 사학자들은 이병도의 학문적 태도에 대해 “민족혼이 빠진 사학”이라며 거칠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병도는 “학문은 냉엄·정확·과학적이어야 한다”며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역사에 따뜻한 정을 가지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침소봉대해 존재하지도 않은 사실을 과장되게 기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분명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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