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고유섭 개성박물관장 취임… 한국 미술사 개척자

우리 미술의 고유성과 예술성을 밝히는 데 진력

오늘날 한국의 미학과 미술사학을 구성하는 여러 줄기의 물길은 1930년대에 미술사를 처음 개척한 고유섭(1905~1944)을 수원지로 하고 있다. 고유섭이 39년의 짧은 생을 살면서 남긴 150여 편의 논문과 글은 그의 관심사가 조선미술의 통사뿐만 아니라 회화, 탑파(塔婆), 고려청자, 건축, 금석학 등 미술사 전반에 뻗어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척박한 한국 미술사학계의 앞날을 밝혀준 횃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고유섭이 미술사 분야에서 막 기지개를 켜던 무렵, 조선에는 독일의 안드레 에카르트와 일본의 세키노 다다시가 각각 쓴 ‘한국미술사’(1929)와 ‘조선미술사’(1932)가 있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외국인이 쓴 것이어서 조선 미술의 요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 고유섭은 그들과 달리 순수 조선인의 관점에서 우리 미술의 고유성과 예술성을 밝히는 데 진력했다.

고유섭은 인천에서 태어나 1925년 3월 서울의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 예과에 입학했다. 훗날 국어학자가 될 이희승이 예과 동기다. 청소년기의 고유섭은 서모와의 갈등이 빚은 가정적 번민으로 늘 고통스러워했다. 1930년 1월 1일자 일기에 “괴로운 나의 가정의 해결은 아편과 주일배(酒一盃)에 있다”고 쓸 정도였다.

그가 탈출구로 삼은 것은 문학 활동이었다. 유진오, 최재서, 이효석 등 경성제대 학생들과 동인지 ‘문우’를 발간하고 대학 내 문학동호회 ‘낙사문학회’에 참여해 여러 편의 시와 수필을 발표했다. 고유섭은 예과 2년 과정을 마치고 법문학부 철학과에 소속되어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했다. 1930년 4월 법문학부 미학 및 미술사연구실의 조수가 되고 1931년 7월 조선미술사에 관한 첫 논문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을 발표했다.

 

척박한 한국 미술사학계의 앞날을 밝혀준 횃불

조수 시절, 고유섭의 관심사는 전국의 탑을 조사·정리하는 것이었다. 고유섭은 연구실 소속 사진기사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종다양한 탑들을 사진에 담았다. 그것을 정리한 결과물이 1932년 1월 ‘신흥’지에 발표된 ‘조선탑파개설’이다. 이 글은 탑의 어원, 우리나라의 조탑 기원, 탑의 재료 등을 밝혀낸 수작이라는 평을 들었다. 1934년 3월 24일에는 전국에서 촬영한 수백 점의 탑 사진 중 63점을 선별해 ‘조선의 탑 사진 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경성제대 강의실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조수로 활동하던 고유섭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33년 4월이었다. 오랫동안 공석인 채로 있던 개성부립박물관의 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탑파 연구는 개성박물관장으로 부임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때의 성과는 ‘진단학보’에 3회 연재(1936, 1939, 1940)된 ‘조선 탑파 연구’로 나타났다. 이 글들은 우리나라 문화유산 중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불탑의 기원, 계통, 양식, 변천 등에 관해 일목요연하게 체계를 세움으로써 한국의 탑 연구에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을 들었다.

고유섭은 탑파 연구 말고도 개성 지역을 답사하며 우리 고대 미술의 진상을 규명하고 토대를 구축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개성의 유적 유물을 조사한 결과는 주간지 ‘고려시보’에 1935년부터 6년 넘게 연재되었다.

고유섭은 또한 1933년 전후한 시기부터 규장각을 드나들며 고문헌 속에서 서화 자료를 찾는 작업에 열중했다. 1936년 이화여전과 연희전문에 미술사 강의를 나가게 되었을 때는 돌아가는 길에 경성제대의 규장각 고서를 빌려가 회화에 관한 문헌 발췌 작업을 계속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정리한 서화론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이 ‘조선화론집성’(1965)이란 이름으로 발간했다.

 

‘개성 3총사’, 고유섭의 영향 받고 미술사 연구에 큰 족적 남겨

당시 개성박물관에는 그를 따르는 일군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훗날 동국대 총장이 될 황수영, 이화여대 교수로 봉직할 진홍섭,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활동할 최순우가 그들이었는데 이 세 사람은 개성에서 태어나 고유섭의 영향을 받고 미술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겨 흔히 ‘개성 3총사’라 불린다.

최순우는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미래 진로를 고민하던 때 우연히 찾아간 개성박물관에서 고유섭이 열심히 유물들을 설명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박물관의 말단 직원이 되었다. 황수영은 경복고보를 나와 도쿄제국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나 방학 때마다 개성 집으로 돌아오면 으레 개성박물관을 찾아가 고유섭에게서 조선의 미에 대한 가르침을 받다 결국 전공을 바꿔 평생을 고유섭의 제자로 살았다. 진홍섭은 개성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 정경학부에 다니다가 방학이 되면 고유섭을 따라 개성 인근의 유적을 답사한 것이 인연이 되어 고유섭의 뒤를 이어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장을 맡게 되었고 평생을 한국 고고미술사 연구에 헌신했다.

1944년 6월 26일 간경화로 타계한 고유섭의 글들을 제자들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황수영은 스승이 남긴 유품 중 한국미술사와 관련된 원고 등을 6·25전쟁의 와중에도, 또 서울 수복 후 전셋집을 전전하는 가운데서도 신줏단지 모시듯 고이 보관했다가 전집을 발간할 때 내놓아 고유섭을 오늘의 우리 앞에 다시 살아 있게 했다.

황수영은 고유섭이 6년 넘게 ‘고려시보’에 발표한 개성의 역사 유적 이야기들을 모아 ‘송도고적’(1946)으로, ‘진단학보’에 실린 탑파에 대한 논문 ‘조선 탑파의 연구’를 ‘한국 탑파의 연구’(1948)로 편집·출판했다. 진홍섭은 고유섭이 생전에 일본에서 일본어로 출판한 유일한 저서 ‘조선의 청자’(1939)를 ‘고려청자’(1954)로 번역·출판해 스승의 학문 세계를 후학들에게 소개했다.

제자들은 또한 1947년 고유섭이 발견한 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경북 경주시 감포 근처 대왕암에 기념비(1974)를 세우고 인천시립박물관 앞 자유공원에 30주기 추모비를 건립(1974)했다. 1980년에는 고유섭의 가족과 함께 미술사학계의 유일한 학술상인 ‘우현 학술상’을 제정, 고유섭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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