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화교들이 조선을 완전히 떠나도록 한 결정적 계기로 작용
1931년 7월 1일 아침, 400여 명의 중국 농민과 200여 명의 조선 농민이 중국 길림성 장춘 교외의 만보산에서 충돌했다. 발단은 그해 4월 만보산으로 이주해온 조선 농민들이 중국인 지주에게서 임차한 미개간지에 물을 대기 위해 20리 떨어진 이통하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였다.
충돌이 있기 전에도 중국 농민들이 수차례 수로 공사를 문제 삼고 중국 장춘현 정부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공사를 중단하도록 명령을 내렸는데도 조선 농민들은 공사를 부추긴 일본의 무력만을 믿고 공사를 강행했다. 충돌은 일본 경찰이 중국 농민들을 무력으로 물리치면서 일단락되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충돌이 국내에 거주하는 화교들에 대한 대규모 보복으로 발전한 것은 일제가 충돌 사실을 왜곡?발표하고 국내 언론이 호외까지 발행하며 민심을 자극한 게 주요 원인이었다.
조선일보 7월 2일자 석간(7월 3일자 조간) 2면에 실린 기사 제목은 이랬다. “중국 농민 대거 폭동 / 삼성보 동포 수난 갈수록 심해져 / 200여 명 또다시 피습 / 완성된 수로 공사 전부 파괴”, “인수 공사 파괴로 금년 농사는 절망 / 파종시에 여차(如此) 폭거”(장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조선일보에 비해 소극적으로 보도하긴 했지만 동아일보 역시 “중국 농민의 폭거 / 만보산 수로 파괴 / 조선 농민 포위코 공포 위협”이라는 제목의 기사(7.4)를 실었다. 그러나 두 신문의 기사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일본 영사관이 제공하는 정보를 장춘 특파원이 사실 확인 없이 서둘러 타전하고 서울의 본사가 원고를 그대로 믿고 활자화한 것이 오보의 원인이었다.
국내 조선인들, 내막도 모른 채 화교들 향해 분노 폭발시켜
국내 조선인들은 내막도 모른 채 기사를 사실로 믿고 화교들을 향해 분노를 폭발했다. 화교 습격은 7월 2일 늦은 밤 인천에서 시작되었다. 화교가 운영하는 상점의 유리창이 깨지고 이에 놀라 뛰쳐나온 화교들은 조선인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다. 7월 3일 아침, 총독부가 인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내려 화교가 경영하는 상점의 영업을 중지시키고 시내에 흩어져 있는 화교들을 중국 영사관으로 대피시켰으나 폭동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인천에서 시작된 화교 배척 폭동은 7월 3일 밤 서울로까지 번졌다. 4일까지 서울에서만 170건이 넘는 폭행과 기물 파손 사건이 발생하고 서울 주재 중국 총영사관으로 피신한 화교만 4,200여 명에 달했다.
피해가 가장 큰 곳은 사망자와 부상자 대부분을 차지한 평양이었다. 7월 4일 밤부터 6일까지 계속된 평양 폭동은 “평양 시외에서 조선인 30명이 중국인에게 몰살되었다”, “만주 장춘에서 60명의 동포가 학살되었다”는 등 근거 없는 유언비어까지 더해지면서 삽시간에 평양 거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화교들의 상점과 가옥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불에 탔다. 약탈과 폭행도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일본 경찰은 평양 시내가 무정부 상태에 빠진 5일 밤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다가 폭동의 기세가 한풀 꺾인 이튿날에야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화교 거리는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총독부는 평양에서만 중국인 119명이 사망하고 163명이 부상했으며 63명이 실종되었다고 발표했다. 전국 400여 곳에서 1주일 남짓 계속된 폭동으로 중국 국민당 정부 추산 142명의 화교가 죽고 546명이 다쳤으며 91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국제연맹의 ‘리턴 보고서’는 사망 127명, 부상 392명으로 발표했다.
일제가 왜곡·발표하고 국내 언론이 민심을 자극한 게 주요 원인
폭동은 뒤늦게 일본의 간계로 인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선·중국의 지식인들과 언론이 사태수습에 나서면서 점차 수그러들었다. 동아일보는 ‘이천만 동포에게 고합니다-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7.7)는 사설로 폭행을 중단하라고 호소했다. 조선의 각 단체들도 화교 피해자를 위문하고 성금을 전달했다. 서울의 화상총회는 길림성 정부에 만주 거주 조선인의 선처를 부탁하는 서한을 보내 사태 수습에 나섰다. 사태가 가라앉은 7월 18일 중국 국민당이 “만보산 사건은 일본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것이고 조선인들의 국내 폭거도 일본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해 ‘만보산 사건’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했다.
화교 배척 폭동은 쇠퇴기에 접어든 국내 화교들이 조선을 완전히 떠나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30년 말 6만 7,790명이던 화교 인구가 1931년 말 3만 6,780명으로 감소했다는 한 조사 통계에서 보듯 1년 사이에 3만여 명의 화교가 조선을 떠났다.
사건을 조사한 주일 중국공사는 “만보산 사건은 한·중 사이의 민족 감정을 자극해 두 민족을 분열시키고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데 이용하고자 한 고도의 계략이었다”고 발표했다. 그 근거로 총독부가 사건을 조작·발표한 점, 폭동을 한동안 방치하고 수일 동안 진압하지 않은 점, 일본인이 조선인 옷을 입고 폭동을 지휘한 점, 화교에 대해 교통·통신 기관을 폐쇄한 점 등을 들었다. 물론 신문의 오보와 유언비어만 믿고 폭동을 일으켜 무고한 화교들을 폭행하고 죽게 한 조선인들의 폭력적 행위 역시 지탄받아 마땅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