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조선의 황금광 시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무작정 금 찾아 나서

대공황기에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통화는 금뿐

금본위제는 화폐와 금의 가치를 일치시키는 제도로 1816년 영국이 처음 채택했다. 뒤이어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이 1870년대에 받아들이고 미국이 1900년 채택했다. 금본위제에 따라 각국의 통화는 중앙은행이 보관하고 있는 금의 양을 기준으로 가치가 매겨졌다. 따라서 예산이나 무역에서 적자를 낸 국가는 자국이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 이상으로 화폐를 대규모 발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금본위제가 위기를 맞은 것은 1차대전 때였다. 주요 참전국들이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화폐를 무작정 늘려 발행했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 금융을 쥐락펴락하던 영국이 1914년 금본위제를 포기했고 다른 국가들이 뒤를 따랐다. 일본은 1917년 9월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이에 따라 금태환(金兌換)은 중지되었다. 금태환이란 금본위제도하에서 해당국 화폐 소유자가 해당국 정부(중앙은행)에 화폐를 제시하며 금과의 교환을 요구할 때 중앙은행이 금을 내주는 것을 말한다.

1차대전 후 세계 각국이 통화 증발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자 미국(1919)과 영국(1925) 등이 다시 금본위제로 복귀했다. 일본은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경황이 없어 복귀하지 못하다가 1930년 1월 13년 만에 금본위제로 돌아왔다. 이후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물론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은행과 대만은행에서도 금화와 화폐를 교환해주는 태환 업무가 재개되었다. 그러자 금값이 폭등할 조짐을 보였다. 금본위제로 복귀할 무렵 일본은 대공황으로 극도의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상품은 팔리지 않았고 물가는 떨어졌다. 그러나 금만은 예외였다. 다른 물가가 아무리 떨어져도 금만은 1돈 쭝에 5엔(조선에서는 5원)이라는 법적 가치를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금본위제로 복귀하면서 내건 명분은 엔화 가치의 회복을 통한 국내 경기의 선순환과 고질적인 무역수지 적자 해소였다. 문제는 상품 경쟁력이 증대되지 않아 해외시장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오히려 금만 해외로 빠져나갔다. 결국 2년 만에 금 보유량이 바닥을 보이자 일본은 1931년 12월 금 수출 금지 조치를 내려야 했다. 이것은 다시 금본위제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이미 영국도 자국의 무역 보호를 위해 1931년 9월 금본위제를 정지한 상태였다. 유럽 각국도 금본위제에서 차례로 이탈하고 미국은 1933년 발을 뺐다.]

 

금광 열풍으로 전국에서 금전꾼의 망치질과 삽질 소리가 끊이지 않아

금본위제를 중단하자 금값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국제통화는 금뿐이라는 데 각국의 생각이 일치했다. 국내통화로서 금의 기능이 정지되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금본위제로 복귀할 것이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국제통화는 여전히 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각국은 세계 어디서나 가치를 인정받는 금의 보유를 선호했다.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총독부는 금 생산 정책을 적극 장려했다. 은행은 채굴된 금을 모두 매입했다. 이에 따라 금의 법정 가치가 폭등했다. 1돈쭝에 5원이던 법정 가치는 1933년 10원, 1935년 13원, 1937년 18원을 돌파하고 1939년에는 30원으로 치솟아 8년 만에 6배나 폭등했다. 금의 생산량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1933년 11.5t, 1934년 12.4t, 1935년 14.7t, 1936년 17.4t, 1937년 22.5t, 1938년 29.5t으로 늘어나더니 1939년에는 31.1t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덕분에 일본은 1939년 남아공, 미국, 소련, 호주와 함께 세계 5대 산금국 대열에 올라섰다.

이처럼 금 생산량이 늘어나도 금값이 계속 치솟자 한반도 전역에 금광 열풍이 휘몰아쳤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무작정 금을 찾아 나섰다. 가난한 이는 가난해서 부자는 더 부자가 되겠다며 금맥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일시적 유행으로 가볍게 취급하던 지식인들도 슬그머니 금 채굴 열풍에 올라탔다. 신문기자, 변호사, 의사, 소설가는 물론 사회주의자, 여성운동가도 앞다투어 금광으로 달려갔다.

소설가 중에는 카프 결성에 산파역을 맡았던 김기진도 있었다. 조선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가 1933년 1월 금광 재벌 방응모에게 넘어가자 “금전꾼 밑에서는 기자노릇 못하겠다”며 사표를 던졌다. 노다지를 발견해 신문사 하나 차리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1934년 4월 평남 안주의 금광으로 달려갔으나 노다지는커녕 금싸라기 한 톨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잔뜩 손해만 본 채 넉 달 만에 손을 털고 서울로 돌아왔다.

채만식도 펜 대신 곡괭이를 들었던 소설가 중 한 명이었다. 채만식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금광 2부작 ‘정거장 근처’(1937)와 ‘금의 정열’(1938)을 썼다. 김유정은 ‘금 따는 콩밭’(1935), ‘노다지’(1935), ‘금’(1938)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금광 3부작’을 써 골드러시의 실상을 후세에 알렸다.

 

대표적인 황금왕은 최창학과 방응모

금광 열풍에 따라 전국 곳곳에서 금전꾼의 망치질과 삽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돌산허리, 개천바닥, 논밭, 집터, 묘지 할 것 없이 모두 금전꾼의 삽질에 뚫리고 구멍이 났다. 그들이 이상적 모델로 삼은 것은 삼성금광과 교동금광이었다.

삼성금광은 노름판과 금전판을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최창학을 하루아침에 갑부로 만들어주었다. 교동금광은 평북 정주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며 꿈을 키우던 촌부 방응모에게 조선일보를 안겨주었다. 특히 최창학의 성공은 서민들의 금 찾기 열풍을 부채질했다. 내세울 만한 가문도 배운 것도 없던 최창학은 금광 전전 10년 만에 일확천금을 이뤄 인생 대역전의 꿈을 일군 황금광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1933년 한 해 동안 금광으로 출원한 곳은 3,222개나 되었다. 1934년에는 5,972건, 1935년에는 5,813건으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중반쯤에는 금광으로 출원된 땅을 피해 새로운 금광을 찾는 일이 사실상 어려워졌다. 그러다 보니 금광 출원증이라는 광업권 증서가 새로운 투기 대상으로 부상했다. 당시 금광 출원이 급증한 것은 금을 캐기 위해 광업권을 확보하는 정상적인 의도보다는 광업권을 확보해 프리미엄을 받고 수십 수백 배의 가격으로 팔겠다는 투기적인 의도가 강했다.

금광 출원 건수는 1934년을 정점으로 점진적으로 줄어들었는데 이는 금광 열기가 식었기 때문이 아니라 금이 조금이라도 나올 만한 땅치고 금광으로 출원되지 않은 곳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금을 캐기 위해 출원된 금광은 20~30%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의 출원증은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팔려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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