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조선어사전편찬회 결성… 핵심 인물은 이극로

구한말 한글사전 역할을 한 것은 외국인이 만든 대역(對譯)사전

한글사전이 나오기 전, 사전의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은 외국어 어휘를 우리말 어휘와 대응해 놓은 대역(對譯)사전이었다. 프랑스 선교사가 파리에서 출판한 ‘한불자전’(1880),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일본에서 펴낸 ‘한영자전’(1890), 영국 선교사 게일이 일본에서 출판한 ‘한영자전’(1897) 등이 초창기의 대표적인 대역사전이다.

구한말 근대 교육이 시작되었어도 순수 조선어사전이 없는 상황에서 대역사전은 유일한 한글사전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역사전은 외국인이 조선어를 공부하거나 조선인이 외국어를 공부할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조선인을 위한 조선어사전이 될 수 없었다. 일제 침탈 후 조선총독부가 통치의 편리를 위해 ‘조선어사전’(1920)을 출판했으나 표제어만 한글로 제시하고 일본어로 뜻을 풀이했다는 점에서 이 사전 역시 대역사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 초기, 순수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시경이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의 제자와 함께 수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 ‘말모이’의 원고를 만들었으나 1914년 주시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1919년 수제자 격인 김두봉마저 상해로 망명해 결국 빛을 보지 못한 채 사장되었다. 1925년 보통학교 교사 심의린이 6,106개의 표제어로 된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을 편찬했으나 자습용 사전이었기 때문에 ‘최초’라는 영예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제대로 된 조선어사전을 편찬하기 위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된 것은 1929년 10월 31일이었다. 편찬회 결성에 주요 역할을 한 인물은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극로(1897~1982)였다.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전 편찬을 추진해 별명이 ‘물불’일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린 108명의 유력 인사 대부분도 이극로가 그러모은 사람이었다. 이극로는 위원장 격인 간사장을 맡았다. 발기인들은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춘 명망가들로 이를테면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다 보니 사전 편찬에 직접적이고 실무적으로 관여한 사람들은 주로 조선어연구회 회원이었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사전 편찬은 난관의 연속

조선어연구회는 1921년 12월 3일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순수 한글 연구단체로 발족했다. 최두선(중앙학교 교장), 임경재(휘문학교 교장), 장지영(조선일보 기자), 권덕규(휘문학교 교사), 이승규(보성학교 교사), 이규방(보성학교 교두), 신명균(한성사범 졸업생) 등 발족 당시 멤버 대부분은 “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도 망한다”고 가르친 주시경의 제자들이었다.

초기에는 회원 수가 많지 않아 회원들끼리 발표회를 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훈민정음 반포 480년을 기념해 1926년 11월 4일을 지금의 한글날인 ‘가갸날’로 제정하고 1927년 2월 10일 동인지 형식으로 ‘한글’을 발간하면서 조선어연구회의 존재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조선어연구회의 활동이 비로소 활기를 띠게 된 것도 이극로의 합류가 있은 뒤였다. 이극로는 한글에 대한 폭넓은 사랑과 지식 못지않게 연구회 운영 자금을 융통하는 데도 탁월했다.

조선어연구회와 조선어사전편찬회는 1930년 1월 역할을 분담했다. 사전 편찬을 위한 어휘 수집 및 주해와 편집 등은 편찬회가 담당하고 맞춤법 통일과 표준어 사정 등은 조선어연구회가 맡기로 했다. 사전 편찬 집필위원들은 다양한 어휘 수집을 위해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어사전’과 게일의 ‘한영자전’에 수록되어 있는 어휘들을 전부 수용하는 외에 신문, 잡지, 소설, 시집 등에서 어휘를 캐내고 조선어연구회 기관지 ‘한글’의 독자들과 방학 때 시골로 가는 학생들에게 지방 말들을 모아오도록 요청했다.

마침 개성의 송도고보 교사 이상춘이 10여 년에 걸쳐 개인적으로 수집한 9만여 개의 어휘를 편찬회에 제공해 큰 힘이 되었다. 이 원고는 상당 부분 정리가 마무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출판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출판이 가능했으나 그래도 편찬위는 다수 전문가가 참여한 제대로 된 조선어사전을 만든다는 생각을 고수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전 편찬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휘 기술 원칙이었다. 수집된 어휘가 아무리 많아도 원칙이 서지 않으면 사전이 불구가 되기 때문이다. 원칙을 정하기 위한 맞춤법 통일은 조선어학회가 담당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연구회가 1931년 1월 확대·개편한 조직이다.

 

‘서울에 사는 중류층이 사용하는 조선어를 표준어로 한다’가 제1원칙

조선어학회가 맞춤법의 제1원칙으로 삼은 것은 ‘서울에 사는 중류층이 사용하는 조선어를 표준어로 한다’였다. 이 원칙에 맞춰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1933.10)되고 ‘조선 표준말 사정’이 완료(1936.10)되었다. 사전편찬에 앞서 가장 중요한 일이 마무리되자 조선어사전편찬회는 1936년 조선어학회에 귀속되었고 사전편찬 작업도 조선어학회로 넘어갔다.

사전 편찬 실무 작업은 1936년 4월 1일 서울 화동 129번지 2층의 조선어학회 사무실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조선어학회에 큰 타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나 차질이 빚어졌다. 수양동우회 사건(1937)과 흥업구락부 사건(1938)으로 조선어학회 간부 중 이윤재·김윤경(수양동우회)과 이만규·최현배(흥업구락부) 등이 일본 경찰에 검거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1938년 10월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조선어사전간행회에서 출간되었다. 수록 어휘가 10만여 개에 이르는 이 사전은 1933년 10월 확정·발표된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철자법에 따라 단어 형태를 결정하고, 뜻풀이 용어도 조선어학회의 ‘표준어 사정’ 원칙에 따랐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사전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그런데 문세영의 사전 원고는 이윤재의 원고를 도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문세영의 사전이 나왔을 때 이윤재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 중이었다.

어쨌든 온갖 우여곡절 끝에 사전 원고를 완성한 조선어학회는 조선총독부에 사전 출판 허가를 신청했고 총독부는 1940년 3월 13일 본문 중 많은 삭제와 정정을 조건으로 사전 출판을 허가했다. 당시만 해도 조선총독부가 조선어사전의 출판 자체를 무조건 금지하지는 않았다. 당시 총독부에 중요한 것은 사전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이냐 아니냐였지 조선어의 사용 여부가 아니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물론 사전에 문제가 될 만한 내용들은 삭제되거나 수정되었다.

그러나 1940년 시작된 창씨개명, 신사참배, 한국어 교육 폐지, 조선어 서적 출판 금지, 신문 폐간 등으로 이어지는 민족 말살 정책은 조선어사전을 비껴가지 않았다. 일제가 기회를 엿보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을 터뜨려 관련자 대부분을 구속하고 사전 원고를 압수함으로써 조선어학회의 13년에 걸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조선어 사전 편찬은 1945년 해방 때까지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 다시 작업을 시작해 1957년 10월 전 6권의 ‘큰사전’을 완간하고서야 1929년 시작된 28년간의 숙제를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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