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美 현대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러시아에 정착

현대무용의 선구자이자 여성해방운동가

이사도라 덩컨(1877~1927)은 고전발레를 과감히 거부한 현대무용의 선구자였다. 무용 밖에서는 결혼 제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여성해방운동가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에게 예술가의 피를 물려준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사회적 인습이나 편견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다방면의 사업을 하면서도 시인, 예술가, 모험가로 활동하고 여러 종의 신문과 잡지를 발간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부모의 이혼으로 덩컨은 어린 시절을 궁핍하게 보냈다. 끼니를 굶는 것이 다반사였고 잠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4명의 남매에게 피아노를 쳐주고 시와 철학 책을 읽어주었다. 물질적으로는 헐벗었으나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이었다. 덩컨은 10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음악과 도서관의 책들을 친구이자 스승으로 삼았다. 틈틈이 인적이 없는 숲 속과 해변에서 춤을 추었다. 이렇게 홀로 무용에 심취하다가 생계를 위해 시카고의 싸구려 뮤직홀 무대에 오른 것은 21살 때였다. 그러나 정식 무용이 아니라 음악이나 시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는 풋내기 신인의 춤이었기에 일시적인 흥미만 불러일으켰을 뿐 기성 무용계로부터 인정은 받지 못했다. 뉴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덩컨은 1899년 가족과 함께 가축 수송선을 타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새로운 무용 세계를 펼쳐 보였다. 200년 가까이 무용계를 지배해온 튀튀(여성 발레복)와 토슈즈는 여성의 몸을 왜곡한다며 벗어버리고 그리스풍의 느슨한 튜닉을 걸친 채 맨발로 춤을 췄다. 엄격한 격식에 따른 전통 발레에 익숙해 있던 유럽인들에게 그의 춤은 파격이고 충격이었다. 강렬한 정서를 표현해내는 ‘맨발의 이사도라’에 런던, 파리, 베를린의 무용계가 열광했다. 관중이 몰렸고 찬사가 쏟아졌다.

 

1905년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 덩컨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아

덩컨은 춤의 영감을 그리스 예술에서 찾았다. 그때까지 무용이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음악과 철학도 무용에 도입했다. 베토벤과 쇼팽의 음악, 니체의 철학에서도 영감을 얻어 무용을 만들었다.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영혼이 살아 있는 동작에 의해서만 진실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춤 철학이었다. 그는 발레의 인위적인 기교를 거부했다. 영국 로열발레단 안무가에게서 고전발레의 테크닉을 체계적으로 배우긴 했으나 규격화된 춤사위를 거부하고 맨발로 무대에서 춤을 추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그의 고집은 기존의 틀을 엎었다는 점에서 당대에는 환호와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덩컨 하면 떠올라야 할 ‘덩컨 스타일’의 꽃을 피우지 못해 후세에는 무용가라기보다 여성해방운동가로 더 강하게 인식되었다. 파괴만 하고 창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덩컨의 춤에 대해서도 찬사만 있지 않았다. 전설적인 무용수 바츨라프 니진스키는 덩컨의 춤을 조롱했다.

1905년 1월 23일 새벽, 러시아 첫 공연을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덩컨의 눈에 긴 장례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전 차르(황제)에게 청원서를 들고 동궁으로 가다 무차별 사격과 칼부림에 죽어간 수백 명 노동자들의 장례 행렬이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덩컨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그녀는 “압제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다.

전통이나 관습에 개의치 않는 덩컨의 태도는 사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이 당연시되던 그 시기에 덩컨은 결혼하지 않고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에게 결혼 제도란 어리석고 노예적인 제도였다. 그러면서도 사랑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아 1906년에는 무대 디자이너 사이에서 첫딸을 낳았고 1910년에는 미국의 대부호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1913년 두 아이 모두 자동차에 탄 채 센강에서 익사해 덩컨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1차대전 발발로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또다시 세 번째 아이를 사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미국이여 안녕. 다시는 너를 찾지 않으리!”

덩컨은 점점 금전적으로 쪼들렸다. 허영심으로 가득한 생활과 낭비벽에다가 유럽에 설립한 무용학교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1917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다시 갈채를 받았지만 그의 오랜 소망인 무용학교의 꿈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21년 러시아 정부로부터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러시아로 오십시오. 당신의 무용학교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덩컨은 1921년 7월, 러시아로 건너갔으나 공산주의 관료 체제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학교 운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신 그는 그곳에서 생애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태웠다. 러시아 천재 시인 중 한 사람인 18세 연하의 젊은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혼한 것이다. 예세닌에 대한 사랑은 헌신과 이해로 일관했으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세닌이 편집광적이고 술에 찌든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예세닌은 덩컨을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려까지 했으며 그의 물건을 부서뜨렸다.

1922년 덩컨은 무용학교 운영비를 모금하고 예세닌의 재능도 홍보할 겸 예세닌과 함께 미국 순회여행길에 나섰다. ‘슬라브 행진곡’을 공연하지 않고 전 세계에서 노동운동의 애국가처럼 불리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어렵게 허용된 입국이었다.

그러나 조국은 이미 소련 사람이 되어버린 그를 냉대했다. 언론은 춤보다 예세닌 부부의 스캔들을 뒤지는데 열심이었다. ‘소련의 동조자’, ‘볼셰비키의 화냥년’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덩컨은 무대 위에서 혁명적 열변을 토해내고 “나체는 진실”이라며 때로는 가슴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시민권을 박탈당해 도망치듯 유럽으로 돌아와야 했다. “미국이여 안녕. 다시는 너를 찾지 않으리!” 떠나면서 남긴 말처럼 그는 다시는 미국을 찾지 않았다.

결혼 생활은 예세닌이 심한 정신착란 증세에 빠지면서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예세닌은 덩컨과 이혼한 뒤 동맥을 끊고 자살했다. 덩컨은 1927년 9월 14일 프랑스에서 그녀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의 스포츠카에 탔다가 목에 건 붉은 비단 숄이 자동차 바퀴에 끼어 감기는 바람에 목이 졸리고 목뼈가 부러져 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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