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로 어린 말을 뜻하는 ‘다다(Dada)’를 별 뜻 없이 집단의 명칭으로 채택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젊은 화가들과 시인들이 무차별한 살육을 피해 안전한 중립국 스위스의 취리히로 피신했다. 그들은 인간의 광기가 초래한 전쟁의 비극을 직접 목도하면서 과학과 경제의 발전이 결국은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데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존의 문명을 근본부터 회의하고 부정하고 배척했다. 사회의 기준과 규범도 맹렬히 공격하고 그들의 문화도 냉소와 풍자로 비웃었다.
개별적으로 세상을 조롱하고 공격하던 그들을 하나로 묶어 구심점 역할을 한 인물은 병역을 거부하고 취리히로 피신해 온 독일의 시인이자 연출가인 위고 발이었다. 그는 1916년 취리히의 골목에 위치한 한 공간을 빌려 프랑스혁명 사상에 영향을 미친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의 이름을 따 ‘카바레 볼테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각자 추구하는 바가 무엇이든 누구든 ‘카바레 볼테르’ 모임에 참여해 모든 종류의 제안과 의견을 공유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이 광고를 보고 1916년 2월 5일 일군의 예술가, 철학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카바레 볼테르’에서 개최한 장르복합적 문화 이벤트에 참석했다.
위고 발은 물론이고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시인 트리스탄 차라, 독일의 시인이자 의사 리하르트 휠젠베크, 알자스 출신의 조각가이자 시인 장 아르프, 루마니아 출신의 화가 마르셀 얀코 등 참석자들은 저마다 시를 낭송하고 춤을 추고 아프리카 음악을 들으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기존 사회의 예술적 전통을 깡그리 무시하고 이성과 제도 속에 억압되어 있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일깨우려는 것이 이벤트의 목적이었다. 얀코는 그날의 모습을 ‘카바레 볼테르’란 제목의 그림으로 남겼다. 이후에도 그들은 ‘카바레 볼테르’가 문을 닫는 7월까지 매일 저녁 모여 시끌벅적한 공연을 펼쳤다.
그들은 1916년 6월 ‘카바레 볼테르’라는 제목의 잡지도 발간했는데 사실상 창간호이자 종간호였다. 잡지에는 아폴리네르, 아르프, 얀코, 피카소, 칸딘스키, 마리네티, 모딜리아니 등의 글과 그림이 실렸다. 위고 발이 서문에 소개한 ‘다다’란 말이 활자화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잡지를 발간하기 전, 그들은 사전을 펼쳐 아무렇게나 골라낸, 프랑스어로 어린 말을 의미하는 ‘다다(Dada)’를 별 뜻 없이 집단의 명칭으로 채택함으로써 이른바 ‘다다이즘’을 세상에 내놓았다.
‘다다’의 기본 원칙은 기존 문화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파괴
다다가 전복하려고 한 유럽 문명의 근본 가치는 르네상스 이래 문화를 지배해온 이성과 합리주의였다. 다다의 기본적 원칙은 이것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파괴였다. 일관된 양식도 합일점도 없었다. 다다의 특성은 허무주의와 부정, 비이성과 역설, 모순과 충격, 반항 정신과 우연성, 아이러니와 반전통 예술, 반현대주의, 반종교, 비도덕 등으로 요약된다.
다다는 모든 우연한 것을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장난스러운 아이러니, 무의미한 수다를 늘어놓는 유아적 쾌감을 즐기며 어리석고 원시적인 것을 추구했다. 이에 따라 소음주의 음악, 아프리카 부족의 토속어로 지어진 시, 언어가 아닌 음성으로 만들어진 음성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읊어대는 동시시 등이 만들어졌다.
그들이 기성의 전통을 거부하면서 다양하게 실험했던 조형적 시도들은 이후 오토마티즘, 아이러니컬하고 유머러스한 콜라주, 사진을 이용한 포토몽타주, 프로타주 등으로 미술사를 장식했다. 별 뜻도 알 수 없는 연극과 퍼포먼스가 공연되기도 했다. 다다이스트들은 ‘다다(DADA)’라는 제목의 잡지를 1917년 7월부터 3회에 걸쳐 발간하고 1918년 ‘다다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과거의 예술 인습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새로운 예술 활동을 펼쳤다.
이른바 ‘다다이즘’이 한 시기의 중요한 예술 사조로 자리 잡게 된 데는 루마니아 태생의 시인 트리스탄 차라의 공이 컸다. 차라는 1916년 7월에 출간한 ‘미스터 소화기의 첫 하늘 모험’에서 “다다는 우리의 맹렬함이다.… 다다는 통일을 원하면서 또한 통일에 적대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분명히 적대한다.… 다다는 훈련이나 도덕이 없는 가혹한 요구이며 우리는 인간성에 침을 뱉는다”라고 정의했다. 1918년 차라가 작성한 ‘다다 선언문’에는 “다다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어떠한 강령도 갖지 않는다는 강령을 갖고 있다”고 해 절대적인 무전제성을 내세웠다.
각국에 다다 그룹이 생겼으나 그중 유명한 곳이 ‘뉴욕 다다’
1차대전이 끝날 즈음 마드리드, 베를린, 하노버, 쾰른, 뉴욕, 파리 등에서도 다다 그룹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다다이즘이 다른 주의나 양식들처럼 단일화된 형식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아 지역적 상황과 개별 예술가들의 기질과 능력에 따라 각각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취리히 다다’와 함께 가장 유명한 것이 ‘뉴욕 다다’였는데 뉴욕 다다의 선구자이고 상징적 존재는 마르셀 뒤샹이었다.
‘뉴욕 다다’는 뒤샹을 중심으로 1915년과 1923년 사이에 유행했으나 ‘취리히 다다’처럼 선언문을 발표하거나 조직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1913년 뉴욕의 아모리쇼에 출품된 뒤샹의 그림 ‘계단을 내려가는 누드 No.2’는 가장 대표적인 다다 양태를 띠었고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17년 4월 10일 뉴욕의 독립미술가협회가 주최하는 전시회에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 ‘샘’을 출품한 것도 다다의 범주에 포함된 행위였다. 대표적인 뉴욕 다다이스트로는 뒤샹 말고도 프랑시스 피카비아와 만 레이가 있다. 피카비아는 유럽의 다다에까지 참여한 전천후 다다이스트였다.
취리히 다다는 주요 멤버가 취리히를 떠나고 1920년 차라마저 피카비아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면서 서서히 막을 내렸다. ‘베를린 다다’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좌익 성향을 노골적으로 표방하는 정치 선전 활동과 결부되어 나타났다. ‘파리 다다’의 특징은 문학적이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다 운동은 일체의 다른 이론을 불합리한 것이라고 배척하는 모든 이론이 그렇듯 이미 그 자체 내에 파괴의 씨앗을 지니고 있었다. 다다는 일상 세계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했다. 어법의 무시, 의미와 논리성의 거부 등 모든 전통적 가치와 모럴의 기성 사회 질서를 철저히 파괴하고자 하다가 마침내 시 자체까지 부정하게 되어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실을 전복하는 방법을 열심히 찾던 다다이스트들은 다다이즘 자체를 전복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앙드레 브르통과 동료들은 다다이즘의 에너지와 창의성을 집중시키려면 어떤 진지한 목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기성의 권위와 질서를 파괴적으로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세계의 구축은 초현실주의의 손에 넘겨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다와 초현실주의는 시기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1922년 차라에 의해 조사(弔辭)가 읽히고 막을 내린 다다이즘은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이 선언한 초현실주의에 생명을 부여한 뒤 완전히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