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의 탄생’의 원작은 토머스 딕슨의 역사소설 ‘클랜스맨’
데이비드 그리피스(1875~1948)는 다양한 영화 기법을 선보인 선구자였고 스타 시스템의 창안자였으며 영화 산업의 개척자였다. 그래서 붙은 찬사가 ‘미국 영화의 아버지’이다. 그의 영화 인생은 20대 내내 활동한 연극판에서 크게 두각을 내지 못하자 1908년 영화사 ‘바이오그라프’에 둥지를 틀면서 시작된다. 이후 1913년 바이오그라프를 떠날 때까지 그리피스가 감독한 영화는 데뷔작 ‘돌리의 모험’ 등 450편에 달한다. 이렇게 다작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영화 상영 시간이 10여 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실험 정신과 호기심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이처럼 많은 영화를 감독한 그리피스였지만 마음 한 켠에는 늘 허전한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러닝 타임이 2시간 이상인 장편영화였다. 마침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장편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1913)이 미국에서 장기 상영에 성공한 터였다. ‘폼페이 최후의 날’은 극적인 스케일과 스펙터클 면에서 관객을 압도했다. 이 작품으로 미국인들은 장편영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했다.
그리피스가 바이오그라프 영화사에 장편영화 제작을 제안했으나 영화사는 흥행성이 없다며 주저했다. 그리피스는 1913년 바이오그라프를 떠나 직접 영화사를 차렸다. 그가 첫 작품으로 선택한 것은 ‘문중 사람’ 혹은 ‘동향인’으로 번역되는 토머스 딕슨의 역사소설 ‘클랜스맨’이었다.
영화는 1914년 7월 4일 크랭크인해 9주 만에 촬영을 끝냈다. 그러나 그 9주는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그리피스의 영화적 재능이 한껏 발휘되고 영화사에도 길이 남을 역사적인 기간이었다. 그전까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클로즈업, 파노라마 촬영, 플래시백(과거 회상 장면) 등 새로운 영화 기법을 마음껏 구사했기 때문이다.
촬영만큼이나 그리피스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3개월이나 걸린 편집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기법은 상이한 이야기를 교대로 보여줌으로써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교차편집’이었다. 사실 교차편집은 영화 전문가들이 ‘클랜스맨’의 등장 전 최고의 영화로 꼽는 에드윈 포터 감독의 ‘대열차강도’(1903)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클랜스맨’의 교차편집은 대열차강도에 비해 세련되고 영화적 효과가 컸다.
그전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화 기법 구사
당시 보통 영화의 8배가 넘는 159분짜리 대작으로 제작된 ‘클랜스맨’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봉된 것은 1915년 2월 8일이었다. 3월 3일 뉴욕에서 개봉될 때는 영화 제목이 ‘국가의 탄생’으로 바뀌어 상영되었다. 기존의 단편영화 요금이 5~10센트였을 때 ‘국가의 탄생’은 2달러나 받았는데도 전국적으로 80만 명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과 500명이 넘는 엑스트라에 혁신적인 영화 기법과 다이내믹한 편집이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덕분에 이전 최고 제작비의 5배인 10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했는데도 5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매출액을 올려 영화산업이 숨은 노다지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시켜 주었다.
‘국가의 탄생’이 개봉된 후 영화의 촬영지인 할리우드는 영화의 중심지가 되고, 영화의 흐름이 유럽에서 완전히 미국으로 넘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영화가 ‘가공과 조작의 예술’로 변신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리피스에게는 “스크린에 혁명을 불러 일으킨 영화감독”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국가의 탄생’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연극배우, 영화배우, 시나리오 작가, 영화 스태프 등을 넘나들며 체득한 연출력과 표현력으로 다져진 그리피스의 뛰어난 영화 감각이 첫째 이유라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당시 대부분의 영화는 장면의 구분 없이 실시간 연극을 카메라에 담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카메라는 촬영 중에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롱 숏(먼거리에서 찍은 숏)이 대부분이었으며 몽타주도 고작해야 필름 재료들을 기술적으로 시간 순서에 맞게 나열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럴 때 시간 구조의 자유로운 조작, 회상의 영화적 묘사, 짧은 플래시 포워드(미래의 시간을 미리 보여주는 기법) 등 그리피스의 연출 기법은 충격과 신선함 그 자체였다.
최초의 할리우드 스타였던 릴리언 기시, 당대 최고의 흥행배우 메리 픽퍼드 등 쟁쟁한 배우들을 캐스팅한 이른바 스타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영화 흥행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뉴욕 등 동부에 둥지를 튼 영화제작자들에게 할리우드가 중심이 되는 서부 캘리포니아의 풍광과 햇빛이 영화 성장의 최적지라고 설득하고 끌고 나선 것도 그였다.
“스크린에 혁명을 불러일으킨 영화감독” 찬사 쏟아져
‘국가의 탄생’ 줄거리는 이랬다. 남북전쟁 중 백인 여자가 자신을 겁탈하려는 흑인 병사를 피하려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자, 여자의 오빠가 KKK 단원이 된다. 이후 오빠의 집은 흑인 부대에 의해 포위되고 죽음 직전까지 몰리다가 KKK단이 등장해 흑인을 무찌르고 백인 오빠를 구하는 장면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남북 간의 앙금이 채 가시지 않고 있을 때, 영화가 백인들은 우호적으로 그리고 흑인들은 동물적이고 거짓말을 잘하며 게으르고 술주정뱅이에다 잔인한 사람들로 묘사하자 흑인 단체들이 “명백한 인종주의”라며 연일 극장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일부 언론도 “역사의식이 빈곤하고, 가치관의 전도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일부 주에서는 “심각한 인종차별주의”를 이유로 영화 상영을 불허했다. 당초 “번개로 쓴 역사 같으며 전편에 진실이 넘친다”고 호평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도 태도를 바꿔 지지를 철회했다.
이처럼 그리피스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졌으나 사실 그리피스의 피에는 남북전쟁의 흔적이 이미 배어있었다. 그 자신이 남부에서 태어난 데다 아버지는 남북전쟁 때 남군 대령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당해 그리피스가 10살 때 죽었기 때문이다. 다만 훗날의 영화사가들은 아버지에 얽힌 그리피스의 영웅담을 반신반의하는 편이다. 그리피스가 자신은 대농장에서 태어났으나 남북전쟁 초기 폭도들이 농장을 다 태워버렸다고 말한 것을 두고도 실제로는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전기 작가들도 있다.
‘국가의 탄생’ 후 그리피스는 쏟아지는 비난에 항변하기 위해 1916년 더 많은 예산을 들여 예술영화 ‘인톨러런스’를 만들었다. 20세기 초의 미국과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예수가 살던 때, 고대 바빌론을 한꺼번에 배경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자신에게 쏟아진 ‘아량 없음’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음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톨러런스’는 흥행에 실패했다. 그래도 ‘꺽인 꽃’(1919)으로는 “스크린의 셰익스피어”란 찬사를 받았고 ‘동도’(1920)는 ‘국가의 탄생’보다 더 큰 수입을 안겨주었다.
1919년 2월에는 장차 할리우드 8대 메이저 반열에 오를 유나이티드 아티스츠(UA)를 찰리 채플린, 메리 픽퍼드 등과 함께 설립할 정도로 승승장구했으나 거기까지였다. 1927년 ‘재즈 싱어’의 개봉으로 시작된 유성영화 시대의 개막 이후 계속 빛을 보지 못하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난 ‘투쟁’(1931)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영화계에서 그를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