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나철, 을사5적 처단 실패 후 단군교(대종교) 창시

항일 독립외교의 선구자이자 단군교(대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종교인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 내내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 임시정부를 통한 외교투쟁,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문화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는 물론 민족 지도자, 역사·국어학자, 무장 독립운동가 중 상당수가 대종교 신자였을만큼 일제 하에서 대종교의 영향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이 대종교를 창시한 이가 나철(1863~1916)이다.

나철은 항일 독립 외교의 선구자였고 을사5적을 처단하려 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으며 단군교(대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종교인이었다. 특히 한국 근대사의 굴곡 속에서 단군 신앙의 재건을 통해 문학·역사·철학·종교·민속 등 우리 문화와 학문 전반에 정체성을 재확인시켜 주고 ‘국학’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업적을 인정받고 있다.

나철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891년 문과에 급제하고 1895년 징세국장(현 국세청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당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사직하고 구국 운동에 뛰어들었다. 첫 행보는 ‘동양평화론’를 앞세운 민간외교였다. 1905년 6월 처음 방문한 일본 도쿄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특명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토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조선의 주권을 보장하고 동양 평화를 위해 한중일 3국이 친선 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회신이 없자 천황 궁성 앞에서 3일 동안 단식을 벌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통한 마음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1906년 1월 24일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나는 백두산에서 수도하고 있는 백봉도사의 제자인 백전”이라며 ‘삼일신고’와 ‘신사기’ 2권의 책을 건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나철은 1906년 5월과 9월 두 차례 일본을 또 방문했으나 외교 투쟁의 한계를 깨닫고 돌아와 비밀결사 조직 ‘자신회’를 기반으로 을사5적 처단에 나섰다.

 

을사5적 처단하려다가 실패 후 피체

나철은 을사5적 처단에 앞서 자금을 조달하고 권총을 극비리에 구입하고 결사대원을 규합했다. 나철은 폭탄을 넣은 상자를 미국인 모씨가 보낸 것처럼 선물로 위장해 을사5적의 1인인 박제순의 집에 보냈으나 박제순이 눈치를 채 성공하지 못했다.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자 작전을 바꾸어 5적을 직접 사살하기로 했다. 1907년 2월 13일(음력 1월 1일)을 거사일로 잡은 나철은 ‘간신을 목 베는 글’이라는 뜻의 ‘참간장’을 수백 장 인쇄해 비밀리에 경상·전라도 지방으로 보내 대원을 모집했다. 그러나 거사 당일 지방 대원들이 미처 상경하지 못해 거사일은 3월 25일 오전 10시로 연기되었다.

결사대는 5적에 1명이 더 늘어난 6명의 역적을 처단하기로 했다. 총 18명으로 편성하고 각각의 책임자를 임명했다. 박제순(1907년 1월 당시 참정대신)은 오기호, 이지용(내부대신)은 김동필, 권중현(군부대신)은 이홍래, 이완용(학부대신)은 박대하, 이재극(법부대신)은 서태운, 이근택(을사조약 당시 군부대신)은 이용채가 거사 책임을 맡았다. 을사6적이 궁궐에 들어가는 3월 25일 결사대원들은 각자 맡은 곳에서 처단자를 기다렸다.

박제순을 맡은 결사대는 광화문 근처에서 박제순을 발견했으나 일본군의 호위가 삼엄해 우물쭈물하다 기회를 놓쳤고, 이재극팀은 서대문을 지날 때 기회를 노렸으나 경비가 삼엄해 역시 총을 쏘지 못했다. 권중현팀은 인력거를 타고 가는 권중현을 보고 총을 발사하긴 했으나 명중시키지 못하고 되레 강상원 대원만 체포되었다. 잇따른 실패로 사방의 경계가 엄중해지자 각각의 결사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워낙 기일이 촉박해 대원들이 연습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게 실패의 원인이었다. 결국 체포된 한 대원이 고문에 못 이겨 거사 전말을 실토하는 바람에 피신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지들은 차례로 체포되었다.

나철은 4월 1일 대한제국의 사법기관인 평리원에 자진 출두했다. 나철을 비롯한 전원은 정부 전복 내란죄로 실형을 받아 유배되었다. 나철은 1907년 7월 유배 10년형을 선고받고 전남 무안군 지도로 유배되었으나 고종의 특사 조치로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났다.

 

대종교, 우리 민족사 전반에 혁명적 변화 몰고 와

나철은 1908년 12월 네 번째 방문한 일본에서 단군교 중광과 관련된 운명적인 만남을 또한번 경험한다. 12월 5일 ‘백봉신사’의 제자 ‘두일백’이라는 노인이 나타나 단군교의 핵심 경전인 ‘단군교포명서’ 등 여러 책을 건네주고, 12월 9일 “국운이 다했으니 속히 귀국해 단군 대황조의 교화를 펴라”고 말을 던지고는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나철은 국내로 돌아와 삼일신고 등 경서를 탐독하고 단군 신앙의 중광을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그리고 1909년 1월 15일(음력) 밤 12시, 오기호·최전·유근·정훈모·이기 등 뜻을 같이하는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 취운정 아래 초가집 북벽에 ‘단군 대황조 신위’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단군교’를 중광했다.

나철이 교주에 해당하는 ‘도사교’에 취임한 가운데 나철을 비롯해 주요 동지들은 과거의 몰민족적 자아를 탈각하는 종교적 통과 의례의 하나로 이름을 모두 외자로 개명했다. 나인영은 나철, 최동식은 최전, 김교헌은 김헌, 신규식은 신정, 조완구는 조량이 되었다. ‘창교’라 하지 않고 ‘중광’이라 한 것은 단군의 옛 가르침을 다시 펼치겠다는 각오이자 고려 때 원나라에 의해 말살되었던 왕검교를 700여 년 만에 부활한다는 의미였다.

대종교의 중광은 절망적 현실 속에서 장차 우리 민족사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주권을 잃어버린 암울한 민족사회 전반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민족 정체성의 와해 속에서 방황하던 수많은 우국지사와 동포에게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일제가 단군교를 항일 독립 단체로 규정하자 나철은 일제의 탄압을 비껴갈 생각으로 1910년 8월 5일(음력) 단군교를 전래의 교명인 ‘대종교(大倧敎)’로 바꿨다. ‘대종’이란 밝고 큰 옛사람인 ‘한얼’ 혹은 ‘단군’을 뜻한다.

그래도 일제가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아 국내 포교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 7월 서울을 떠나 강화 참성단을 참배하고 평양을 거쳐 중국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에 거점을 마련했다. 1914년 5월 13일에는 대종교 총본사를 이곳으로 옮겨 만주 항일 투쟁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사도본사(四道本司)로 나누어 각각의 책임자를 임명했다. 동만주에서 연해주를 총괄하는 동도본사는 서일, 남만주에서 산해관까지 이르는 서도본사는 신규식과 이동녕, 북만주에서 만주리까지 총괄하는 북도본사는 이상설, 한반도 전역을 통괄하는 남도본사는 강우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 끊어

대종교가 조선인 사이에 급속도로 번져가자 중국 정부가 1914년 11월 해산령을 내렸다. 나철은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 1915년 1월 남도본사가 있는 서울로 돌아왔다. 1915년 10월 일제가 포교 규칙을 공표해 종교 등록을 받자 나철 역시 ‘신교’라는 이름으로 등록 신청서를 냈다. 하지만 총독부는 다른 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주면서도 대종교만은 받아주지 않았다. 단군을 인정하면 동화정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불법화한 것이다.

결국 남도본사가 1916년 강제 해산되자 나철은 단군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 한글학자 김두봉 등 6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구월산 삼성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1916년 8월 음력 보름날(양력 9월 12일)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문을 열지 말라”며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대종교의 수행법인 조식법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철에 이어 교주가 된 김교헌은 1918년 개천절에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를 선포해 일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당시 대종교의 위세는 어느 정도였을까?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29명 가운데 21명이 대종교인이고 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한 이시영·이동녕·신규식·조완구·박찬익·조성환·김동삼 등도 대종교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임시정부는 대종교에 의해 결성되고 운영된 셈이다. 조소앙·안재홍·안호상 등 민족지도자, 신채호·박은식·정인보 등의 역사학자, 최현배·주시경·김두봉·이극로·김윤경 같은 국어학자 역시 대종교 신자였다. 홍범도는 물론 김좌진과 휘하의 북로군정서 병사 대부분도 대종교인이었고, 지석영·나운규·홍명희도 대종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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