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자의 젊은 날도 가슴에 빨갛게 멍이 드는 삶의 연속
여고 3년생이던 1958년, 단발머리의 이미자(1941~ )가 아마추어 노래자랑 프로그램인 HLKZ TV ‘예능 로터리’에 출연해 최고상을 차지했다. 당시 심사를 맡은 평론가 황문평은 이미자의 목소리에 반해 작곡가 나화랑에게 이미자를 추천했다. 이렇게 이미자는 나화랑의 연구생이 되었고 1959년 나화랑 작곡, 반야월 작사의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다. 동명의 음반에는 ‘집시의 여정’, ‘워싱턴 블루스’ 등도 수록되었으나 ‘열아홉 순정’만큼 인기가 높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이미자는 한 해 전 ‘행여나 오시려나’ 등 4곡을 취입했으나 ‘열아홉 순정’을 자신의 공식 데뷔곡으로 삼고 있다.
이미자는 1963년 악단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와 결혼을 하고 1964년 여름 임신 9개월의 몸으로 한국 대중가요사에 길이 빛나는 백영호 작곡, 한산도 작사의 ‘동백 아가씨’를 녹음했다. 노래는 1964년 8월 29일 개봉된 김기 감독,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동백 아가씨’의 영화 주제곡으로도 사용되어 한 달 전 출시된 LP 레코드는 불티나게 팔렸다.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쉬운 곡조에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서러운 상처를 건드린 것이 주효해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하루 몇백 장씩 음반을 찍는 게 고작이던 시절에 10만 장이 팔려나갔으니 지금의 100만 장에 못지않았다.
1964년은 대중음악사적으로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해 록그룹 ‘키보이스’와 신중현의 ‘애드포’가 최초의 한국 록음반을 발매하고, 4인조 남성 보컬그룹 ‘아리랑 브라더스’가 국내 첫 통기타 음반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미자와 ‘동백 아가씨’의 철옹성을 깨지는 못했다. 이미자는 ‘동백 아가씨’ 한 곡으로 1964년을 자신의 해로 평정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는 ‘동백 아가씨’의 노랫말처럼 이미자의 젊은 날도 가슴에 빨갛게 멍이 드는 삶의 연속이었다.
발표하는 노래마다 쉬운 곡조에 사람들의 서러운 상처 건드려
이미자는 서울 한남동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2살 때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불행을 집안 어른들이 며느리 탓으로 돌리는 바람에 어머니 등에 업혀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강원도 강릉으로 이사했다. 4살에 다시 친가로 옮겨와 살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국 남남이 되어 이미자는 엄마 얼굴을 잊고 살았다. 이미자 역시 22살에 결혼한 첫 남자와 3년 만에 파경을 맞고 딸 정재은(가수)과도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미자의 노래는 ‘사랑의 기쁨’보다 ‘이별의 슬픔’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음조와 가사 마디마디에는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과 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동백 아가씨’는 가요사적 의미에서도 중요한 노래로 기록되고 있다. 미8군 출신 가수들이 주축을 이루던 가요계를 트로트 붐으로 급선회시켜 트로트 시대의 문을 열게 한 것이 이미자였고 ‘동백 아가씨’였기 때문이다. ‘동백 아가씨’에 이어 이미자가 부르는 노래마다 크게 히트를 치자 당시 유명했던 20여 명의 작곡가가 주로 이미자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지구레코드로 모여들었다.
오아시스레코드에서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천재 작곡가 박춘석도 이미자를 위해 이적을 자청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이 때문에 스윙과 탱고 등 경쾌한 노래도 부르던 이미자의 이미지는 트로트 그것도 애가(哀歌) 전문 트로트 가수로 굳어졌다. ‘섬마을 선생님’, ‘그리움은 가슴마다’,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황혼의 블루스’ 등은 순전히 이미자를 위해 작곡된 노래들이었다.
최고 가수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이미자라도 시대가 쳐놓은 ‘금지곡’이라는 굴레에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대표적인 노래 중 먼저 유탄을 맞은 것은 ‘동백 아가씨’였다. 왜색이라는 이유로 1965년 방송이 금지되고 1968년에는 공연 및 앨범 제작까지 묶였다. 일부 평론가들 사이에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른 주체성 확립 차원에서 본보기로 규제한 시대적 희생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미자는 ‘동백 아가씨’의 금지 이유를 다르게 설명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동백 아가씨’를 무척 좋아해 청와대에서 만찬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불러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며 “정말로 ‘동백 아가씨’가 왜색이어서 정부가 금지했다면 박 대통령이 그 노래를 내게 부르게 했을 리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연속되는 빅히트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던 타 음반사가 극에 달한 ‘반일감정’에 편승해 심의실과 결탁한 뒤 여론몰이를 통한 ‘마녀사냥’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했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3대 히트곡 금지곡으로 묶여
‘동백 아가씨’와 함께 3대 히트곡으로 불리던 ‘섬마을 선생님’(1967년)과 ‘기러기 아빠’(1975년)도 각각 ‘일본곡 표절’, ‘퇴폐 저속’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이미자는 ‘섬마을 선생님’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폈다. “작곡가 박춘석이 일본으로 가 확인한 결과 ‘섬마을 선생님’과 일본의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곡 중 세 소절이 유사한 것을 발견했지만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가 ‘섬마을 선생님’보다 늦게 나왔기 때문에 표절 시비를 하려면 미소라가 표절했다고 해야 한다”고 항변했다.
이처럼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금지곡이 된 노래 대부분은 10~20년이 흐른 뒤인 1987년 8월 해금되었다. ‘동백 아가씨’를 비롯해 ‘유달산아 말해다오’, ‘기러기 아빠’, ‘꽃 한 송이’, ‘네온의 블루스’ 등 5곡이 해금되고 2년 뒤에는 ‘일본곡 표절’ 오해도 풀려 ‘섬마을 선생님’도 해금되었다. 1967년 11월 이미자는 우리 가요사에 길이 빛날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겼다. 개인 가수로는 대중가요 사상 최초의 박스 음반세트를 한정본으로 발매한 것이다. 나무로 제작한 박스에는 4장의 음반과 책자가 담겼다.
이미자는 트로트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트로트 여왕’,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렸으나 그녀 역시 한때는 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수많은 갈채와 사랑을 받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자신이 부르는 트로트 노래가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노래라는 강박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점 우리 것을 소중히 여기는 풍조가 확산되면서 또 나이가 들수록 이미자의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미자의 인기는 식기는커녕 높아만 갔다. 1990년 이미자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과 노래를 취입한 가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그때까지 발표한 음반은 총 560장에 발표곡 수 2069곡이었다. 게다가 500편에 가까운 영화·TV드라마․라디오연속극 주제가까지 불러 누구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