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즈카 오사무
일본 만화의 아이콘이자 아시아 만화영화의 대표작
데즈카 오사무(1928~1989)는 ‘일본의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일본 만화계의 전설이다. 까만 뾰족머리에 크고 검은 눈동자를 한 통통한 소년 ‘철완 아톰'(한국명 ‘우주소년 아톰’), 밀림을 뛰어다니는 흰 사자 ‘정글 대제'(한국명 ‘밀림의 왕자 레오’), 모자를 쓴 깜찍한 남장소녀 ‘리본의 기사’(한국명 ‘사파이어 왕자’)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창조된 대표적인 만화였지만 이것 말고도 그가 세상에 내놓은 만화는 300여 편이나 된다. 그 중 대표작이자 출세작이 1952년 4월호 ‘소년’지에 연재를 시작한 ‘철완 아톰’이었다. 1년 전인 1951년 4월호 소년지에 ‘아톰 대사’란 제목으로 등장한 적이 있었지만 아톰은 그 만화에서는 조연이었다. 따라서 ‘철완 아톰’은 아톰이 주연으로 데뷔한 첫 만화였다.
아톰은 소년지가 폐간될 때까지 17년간 장기 연재되다가 성인신문인 산케이신문에도 잠시 얼굴을 드러냈다. 아톰이 일본 만화의 아이콘이자 아시아 만화영화의 대표작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1963년 1월 1일 일본 후지TV의 방송전파를 탄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90분 분량의 극장용 만화영화가 주류였던 시절에 매주 30분씩 TV에서 만화영화를 상영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성공으로 일본에는 TV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산업이 태동하게 된다. 아톰이 최고 시청률 40%를 기록하며 인기를 끌자 만화영화의 종주국 미국에서도 NBC TV가 아톰을 수입해 1963년 9월부터 ‘아스트로 보이’라는 제목으로 방송했다. 이름을 ‘아톰’에서 ‘보이’로 바꾼 것은 ‘아톰’이 영어로 ‘방구’를 의미하는 은어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수입되어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제목으로 1970년대 어린이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는 1966년 말까지 193회 방영된 뒤 중단되었다가 1980년부터 1981년까지 다시 컬러화면으로 만들어져 52회 방영되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던 아톰
데즈카 오사무는 만화영화를 보기 위해 아침에 극장에 들어서면 마지막회가 끝나고서야 극장 문을 나섰을 만큼 어려서부터 만화광이었다. 디즈니의 ‘백설공주’는 50번, ‘밤비’는 80번도 넘게 보았다. 그는 오사카제국대 의학부를 나온 것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중학교 졸업생 자격으로도 입학이 가능했던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래도 의대 졸업생과 마찬가지로 1953년 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해 의사 면허를 땄고 1961년에는 의학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데즈카의 만화가 지면에 처음 등장한 것도 의학전문학교 2학년이던 1946년 1월 마이니치 어린이신문에 4컷 만화를 그리면서였다. 그는 만화와 의학 공부를 병행하며 박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의사로서 환자를 돌보기보다는 만화로 전후 황폐했던 일본 어린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던 ‘아톰’의 탄생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로 술에 취한 미군 병사로부터 얻어맞았던 어렸을 적의 개인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 지구인과 우주인의 알력, 인간과 로봇의 오해 등 이질적인 집단 간의 불화를 다룬 아톰의 테마는 이때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아톰은 패전으로 실의에 잠겨 있던 일본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도 했지만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도 끌어내 훗날 일본이 전자산업 왕국으로 비상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비정상적일 만큼 인간형 로봇이 발달한 것도 그 바탕에는 아톰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2000년 걸어다니는 로봇 ‘아시모’를 만든 혼다 기술자에게 처음 내려진 지시도 “아톰을 만들라”였다고 한다. “앞은 캄캄하고 불합리하며 불안정한 현대 생활! 울적함을 가장 민첩하고 손쉽게 그리고 가장 분명하게 주위에 호소하는 수단. 그것이 결국 만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데즈카가 말하는 만화의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