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홍명희 ‘임꺽정’ 소설 조선일보에 연재

↑ 조선일보에 연재된 소설 ‘임꺽정’ 첫 회 (1928년 11월 21일자)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자 부친이 목 매달아 자살

“자-. 임꺽정이의 이야기를 붓으로 쓰기 시작하겠습니다.… 각설 명종대왕 시절에 경기도 양주 땅에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란 장사가 있어….” 1928년 11월 21일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홍명희(1888~1968)의 대하소설 ‘임꺽정(林巨正)’의 첫 회는 이렇게 시작된다. 연재소설의 인기에 따라 신문 판매부수가 좌우되던 시절, 경쟁지 동아일보가 이광수의 ‘마의태자’와 ‘단종애사’ 등으로 성가를 높일 때였다. 조선일보는 연재소설을 쓸 작가 확보에 부심했고 그래서 생각해낸 비장의 카드가 홍명희였다.

홍명희는 충북 괴산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12살 때인 1900년 혼인하고 13살 때 상경해 중교의숙을 다니며 신학문을 접했다. 결혼한 지 3년 만인 1903년에 맏아들 홍기문이 태어났는데 그때 홍명희는 15 살이었고, 할아버지는 33살이었다. 1906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요상업학교 예과를 거쳐 1907년 다이세이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재학 시절 특출나게 공부를 잘했으나 점차 학업에 열의를 잃고 사상적인 번민에 빠져 5학년 2학기 말인 1910년 2월 졸업 시험도 치르지 않고 귀국했다.

고향에서 칩거하고 있던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으로 나라가 망해 큰 충격에 빠졌으나 무엇보다 그를 아프게 한 것은 그날 저녁 충남 금산군수로 재직 중인 부친 홍범식의 자살이었다. 부친은 망국의 분통함을 참지 못해 10여 통의 유서를 써놓고 객사에서 목을 맸다. 홍명희는 부친이 유서에서 자신에게 당부한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액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놓고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부친의 순국 이후에는 한동안 은둔하다가 1912년 가을 평생의 벗이자 장차 사돈이 될 정인보와 함께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하지만 수입이 일정치 않고 생활이 궁핍해 1914년 11월 몇몇 동지와 함께 남양 지역으로 향했다. 화교들이 동남아에서 큰돈을 벌어 중국 혁명에 자금을 대는 것을 보고 자신도 남양에서 독립운동의 물적 기반을 마련하겠다며 떠난 여정이었다.

홍명희는 보르네오섬을 거쳐 1915년 3월 싱가포르에 정착한 뒤 독립운동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고무농원과 고무공장을 운영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결국 1917년 12월 남양 생활을 청산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 동생 홍성희가 전해준 집안의 쇠락 소식을 듣고 조국을 떠난지 6년 만인 1918년 7월 귀국했다.

홍명희

 

1919년 그의 주도로 일어난 고향(괴산)의 만세운동은 충북 지역 최초

홍명희가 고향에 칩거하고 있던 1919년 서울에서 은밀히 3·1 운동이 추진되고 있었으나 홍명희는 서울에 있지 않아 구체적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세가 미묘함을 감지하고 1919년 3월 1일로 예정된 고종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엄청난 만세 시위 현장을 보고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3월 19일 주도한 만세 시위는 충북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만세 함성이었다. 홍명희는 3월 24일 또다시 대규모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1년 1개월을 복역하고 1920년 4월 출감했다. 그 사이 집안의 가세는 더욱 기울어 대저택은 물론 그 많던 전답도 대부분 남의 손에 넘어갔다. 결국 홍명희는 대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 셋집을 전전했다.

홍명희가 언론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24년 5월이었다. 먼저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입사하고 1년 뒤 시대일보로 옮겨 편집국장, 부사장, 사장으로 활동했으나 시대일보가 재정난을 견디지 못하고 1926년 8월 문을 닫아 그해 10월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 무렵 그는 사회주의 단체인 신사상연구회와 정우회에 참여했다. 큰아들 홍기문도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으나 부자는 노선이 달라 미묘한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러다보니 아들과 이념 논쟁을 많이 했다. 그런데 한창 논쟁이 무르익을 때면 홍기문이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잦아 논쟁의 맥이 끊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아들이 왜 밖으로 나가는가를 알아봤더니 논쟁이 과열되어 담배를 피우려고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논쟁할 때는 돌아앉아 담배를 피워도 좋다고 허락해 결국은 그토록 대단한 양반 가문에서 부자가 맞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1927년 홍명희는 한창 논의 중인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상경해 1927년 2월 15일 출범한 신간회의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당시 신간회는 조선일보가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일보와 새롭게 인연을 맺게 되었다. 동생과 아들도 머지않아 조선일보 식구가 되었다. 동생 홍성희는 1930년대 초반 판매부장을 지내고, 장남 홍기문은 1928년부터 조사부장·학예부장·논설위원 등을 거쳐 1940년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홍기문은 1935년 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맡았다. 그가 이끄는 조선일보 학예부에는 시인 김기림, 문학평론가 이원조, 철학자 박치우, 해외문학파 함대훈·이헌구, 화가 안석주 등 쟁쟁한 인물이 기자로 일했다. 다른 부서에 근무하던 역사학자 문일평·황의돈, 국어학자 방종현, 시인 백석 등도 지면 제작을 도왔다. 홍기문은 이들을 지휘하고 회사 밖 문인·학자들과의 교분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신문을 만들기 위해 애썼다.

홍기문은 조선일보에서 일하는 동안 국어학을 중심으로 국학(國學)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글을 지면에 발표했다. 논문만 해도 1933년 1월 29일 자부터 23회 연재된 ‘혼란 중의 철자법, 그 정리의 일안(一案)’을 비롯해서 국어학 12편, 국문학 4편, 국사학 3편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풍속·언어·역사·속담을 소개하는 ‘잡기장’ ‘소(小)문고’라는 고정란을 싣기도 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고서(古書)의 오류를 잡아낼 정도로 고증에 철저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때가 1443년 12월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사람도 그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조선일보로 돌아와 전무이사를 지내다가 1946년 서울신문 편집국장직을 수행하면서 ‘조선문화총화’(1946), ‘정음발달사’(1947), ‘조선문법연구’(1947)를 펴냈다.

홍명희 아들 홍기문

 

소설은 주인공 임꺽정만큼이나 고달픈 여정 겪어

임꺽정은 이처럼 홍명희가 신간회로 한창 분주할 때이던 1928년 11월 21일 연재를 시작했다. 홍명희의 최초이자 유일한 소설 ‘임꺽정’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열풍엔 ‘흥행’이나 ‘인기’로만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관군에 맞서며 수탈당하는 민중 편에 선 하층민 사내의 이야기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를 겪고 있던 민족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주인공 임꺽정만큼이나 고달픈 여정을 겪어야 했다. 첫 시련은 1929년 12월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조병옥·허헌 등과 함께 홍명희가 구속되면서 시작되었다. 독자의 빗발치는 아우성에 홍명희는 유치장에서까지 연재를 이어갔으나 결국 12월 26일 302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중단했다. 1932년 1월 출옥해 몸을 추스르고 1932년 12월 1일 번호를 1회부터 다시 매겨 541회까지 연재하다가 1934년 9월 4일 두 번째 중단했다.

열흘 뒤인 9월 15일 다시 1회부터 연재를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홍명희의 와병이 문제가 되어 1935년 12월 24일 239회를 끝으로 또 중단되었다. 1937년 12월 12일 4번째로 시작된 연재도 1939년 7월 4일 363회로 중단되었다. 이를 모두 합치면 10년 7개월여간 총 1,445회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1940년 8월의 조선일보 폐간으로 연재 기회를 영원히 놓친 임꺽정은 조선일보 자매지 ‘조광’에서 연재를 시작했으나 이마저도 1941년 10월호를 끝으로 독자들의 곁을 완전히 떠났다. 그래도 광복 전 신문 연재소설로는 최장기 기록이었다.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전형이자 민족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

연재 기간이 길었던 만큼 일화도 많았다. 특히 소설 속 남녀 간 사랑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인 것을 두고 젊은 문인들은 ‘만풍(晩風·늦바람) 선생’이라고 놀렸다. 사실 홍명희는 이광수 등 동시대의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이 조혼한 전처를 버리고 신여성과 재혼한 것과 달리 구여성인 조강지처와 해로한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소설에 대한 찬사도 끊이질 않았다. “조선어와 생명을 같이할 천하의 대기서”(이광수), “조선문학의 대유산”(이기영), “미증유의 대걸작”(박영희), “조선어의 일대 어해”(이효석)라는 극찬이 쏟아졌다. 이후에도 평론가들은 “우리말의 방대한 보고”, “근대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전형이자 민족문학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이라고 평했다.

‘임꺽정’은 1939년 10월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전8권 예정으로 제1권이 출간되고 1940년 2월까지 모두 4권이 간행되었으나 나머지 4권은 간행되지 못했다. 1939년 말 홍명희는 지식인을 겨냥한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피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으로 이사했다. 양주군은 임꺽정의 고향이었다. 해방 후에는 서울신문사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곧 그만두고 정치 활동에 전념했다. 그 무렵 홍명희는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좌우익 정치·사회 단체들의 간부 명단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다만 1945년 12월 결성된 좌익·중도파의 최대 문인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고 김일성·무정 장군 서울 방문 환영준비회 위원장으로 추대된 것은 자신의 뜻이었다.

홍명희는 신탁통치 파동을 겪고 난 후 중간파 정당 활동을 통한 민족통일정부 수립운동에 투신했다. 1947년 10월 노동자당도 자본가당도 아닌 중립당을 표방한 민주독립당을 창당해 당 대표가 되었다. 1947년 12월 중간파 정치 세력을 망라한 민족자주연맹(주석 김규식)이 결성되었을 때는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면서 북한은 수차례 방북했다.

 

1948년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다가 북한에 그대로 눌러앉아

그 무렵 홍명희가 가장 우려한 것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단선)와 단독정부(단정) 수립이었다. 결국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방북했다가 북한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당시 북행한 남측 인사 400여 명 중 홍명희처럼 북에 잔류한 사람은 백남운·이극로 등 70여 명이나 되었다. 4월 23일 홍명희가 ‘조선 정치 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낭독하고 이극로가 ‘3,000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낭독했다. 두 사람이 ‘결정서’와 ‘격문’을 읽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북한에 남기로 작정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월북에 앞서 아들 홍기문과 딸은 이미 북한에 가 있었고, 아내와 가솔들만이 괴산에 남아 있었다. 홍명희는 가족에게 편지를 써 평양으로 오라고 했다. 20여 명의 대식구가 38선을 넘어 1948년 8월 평양에 도착하자 김일성은 자기가 살던 집을 내주는 등 파격적으로 대우했다.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박헌영, 김책과 함께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이후 조선최고민민회의 부위원장, 과학원장, 북조선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다가 1968년 3월 5일 80세로 천수를 누리고 평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1948년 북한 초대 내각 사진. 앞줄 왼쪽 세번째부터 홍명희,김일성, 박헌영이다.

 

아들 홍기문은 1947년 월북해 국어학 연구와 문화 활동에 전념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김일성종합대 교수, 과학원 어학연구소 소장을 거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장, 사회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1992년 죽는 날까지 국어학을 연구했다.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번역 공로로 ‘노력 영웅’이라는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홍명희는 “아들을 왜놈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며 홍기문을 손수 가르쳤다. 그덕에 홍기문은 한국 향가의 최고 대가가 되었다. 양주동이 ‘조선고가연구’(1942)를 쓴 다음 “내가 죽은 뒤에 100년 안에 이 책을 수정할 내용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이를 바로잡은 사람이 홍기문이었다.

 

월북 후 남쪽에서는 소설과 작가 모두 ‘금기의 영역’

홍명희의 월북 후 ‘임꺽정’은 남쪽에서는 ‘금기의 영역’이 되었다. 을유문화사가 전 10권으로 기획해 1948년 2월부터 11월까지 6권을 발간했으나 나머지 4권은 홍명희의 북행으로 무산되었다. 이후 임꺽정은 남쪽에서 전설 속에 묻혀 지내야 했고 홍명희는 뇌리에서 지워져 ‘홍모’로 불렸다. 북한에서는 1954년 평양에서 ‘림꺽정’ 6권이 1954~1955년 사이에 간행되었다. 남한에서는 1985년 9월 사계절출판사가 미완의 ‘임꺽정’을 그대로 인쇄해 문공부에 납본했으나 납본필증이 나오지 않아 10월 5일 자동적으로 판매 금지가 되었다. ‘임꺽정’은 1988년 해금되고 1991년 사계절출판사에서 전 10권으로 정식 출판되었다.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더불어 일제 시대 3대 천재로 꼽히지만 최남선과 이광수는 거대한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일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홍명희는 월북 문인으로 한동안 남쪽에서는 잊힌 존재가 되었다.

을유문화사에서 1948년 발간된 임꺽정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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