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日 히로히토 제124대 천황 즉위… 그 자체로 일본의 20세기 역사

일본의 군국주의 팽창사와 궤적을 같이하는 사실상 전범의 삶

히로히토(1901~1989) 일본 천황의 생애는 그 자체로 일본의 20세기 역사다. 특히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기까지의 삶은 일본의 군국주의 팽창사와 궤적을 같이하는 사실상 전범의 삶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패전 후 목숨을 부지하며 88년간이나 장수하는 놀라운 생명력을 과시했다.

히로히토는 어려서부터 군국주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다. 어린 히로히토를 가르친 인물은 러일전쟁의 영웅이자 군국주의자 노기 마레스케였다. 노기는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사망했을 때 천황을 따라 부부가 함께 자살한 골수 천황파였다. 히로히토는 훗날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노기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을 만큼 노기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히로히토는 11세 때 왕세자에 책봉되고 13세 때부터 제왕학 교육을 받았다.

젊은 시절 히로히토의 학문적 취미는 생물학이었다. 10세 때부터 곤충, 야생초, 나비들을 수집·기록하고 17세 때는 새로운 붉은 새우를 발견해 해양생물학자라는 명예를 얻었다. 천황으로 즉위한 후에는 궁 안에 생물학연구소를 설치할 정도로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다. 여자 관계가 복잡했던 조부 메이지 천황과 부친 다이쇼 천황과는 달리 히로히토는 유년 시절부터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으며 즉위 후에도 일부일처를 고집했다.

히로히토는 다이쇼 천황이 건강 악화로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1921년 11월 섭정에 취임함으로써 20세 나이에 사실상 천황 역할을 했다. 당시만 해도 천황 자리는 신성하되 상징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일본의 군부 실력자들은 그저 한 젊은이가 권좌에 오른 것으로 생각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더욱이 히로히토는 왜소하고 유약해 보이는 데다 말도 없었다. 히로히토는 군부 권력자들과 대립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조용히 섭정 자리를 지켰다.

히로히토가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1923년 9월의 관동대지진 때였다. 구조대를 조직·지휘하고 병원을 방문하고 폐허 지역을 순시하는 그의 모습에, 국민은 비로소 히로히토를 가까운 존재로 느끼기 시작했다. 히로히토는 다이쇼 천황이 죽은 1926년 12월 25일 25세 나이로 제124대 천황에 즉위했다. 연호는 중국 서경 요전에 나오는 ‘백성소명 만방협화(百姓昭明 萬邦協和)’에서 딴 ‘쇼와(昭和)’를 사용했다.

 

‘쇼와’는 단순한 연호가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 대명사

즉위 후 일본군의 중국 산동 출병(1927), 제남전쟁(1928),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진주만 기습(1941) 등 아시아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각종 침략이 숨가쁘게 전개되고, 한국 역시 일제의 총칼에 의해 질곡으로 빠져들면서 ‘쇼와’는 단순한 연호가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 대명사로, ‘쇼와 시대’는 그 군국주의가 무한으로 팽창하는 시기로 인식되었다. 일본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히로히토가 말을 타고 궁성 정문 이중교에 나타나면 군중은 열광적으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충성을 다짐했다. 이런 그의 위엄 하에서 조선은 더욱 더 일본에 동화되고 중국은 전쟁터가 되었다.

히로히토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36년의 2·26 쿠데타다. 히토히토는 일부 장교에 의해 일어난 이 쿠데타를 단호하게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전에 볼 수 없었던 히로히토의 결단으로 쿠데타는 분쇄되었고 히로히토의 국정 관여권은 더욱 강력해졌다.

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을 전후로 한 시기에 미국을 비롯해 연합국의 각국 정부는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처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 역시 일본에 처음 발을 내디딜 때는 본국 정부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각료들로부터 “천황이 그대로 자리를 지켜야 일본을 통치하는 게 더 쉬워질 것이다”, “천황은 일본 내 좌익 혁명 세력을 억제하는 데 20개 사단의 힘을 갖고 있다”는 등의 보고를 받은 후에는 생각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패전 후, “짐은 현인신이 아니다” 인간선언

이런 상황에서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가 미 대사관의 맥아더를 방문했다. 히로히토는 대화 도중 “내가 책임을 모두 지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라며 생전 처음 ‘짐’이란 호칭 대신 ‘나’라는 단어를 썼다. 히로히토가 자신을 전쟁 범죄자로 기소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할 것으로 예상했던 맥아더는 히로히토 자신이 전쟁 수행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

그날의 만남 후 맥아더는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천황은 전 일본인을 묶는 구심점이며 천황을 전범으로 몰아 처형한다면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10월 30일 미 의회와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보고를 받아들여 “전범 체포 작업은 지속적으로 진행하지만 천황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대일본 정책을 수정·하달했다. 죽음의 문턱으로까지 내몰렸던 천황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히로히토는 1946년 1월 1일 “짐은 현인신이 아니다”라는 이른바 인간 선언으로 허리를 더 낮추는 자세를 취했다. 이후 히로히토는 맥아더에 의해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달리 ‘타고난 평화주의자’로 서방에 인식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군부 강경파에 의해 주도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고 오히려 전쟁을 중단시키는 대결단을 내린 인물로 부각되었다.

1946년 5월 개정한 국제전범재판소의 수석검찰관인 미국의 조지프 키난도 히로히토를 기소하기는커녕 11세 때부터 써온 히로히토의 일기가 증거로 채택되는 것까지 막았다. 이후 히로히토의 삶은 평화와 안정의 이미지로 일관했다. 71세 때인 1972년 6월 24일 재위 1만 6,619일을 넘겨 그동안 메이지 천황이 갖고 있던 일본 황실사상 최장 재위 기간을 경신하고 84세 때인 1985년 7월 13일에는 역대 천황 가운데 최장수를 기록했다. 5년간의 섭정 기간을 포함해 68년 동안 천황 자리를 지켜온 히로히토가 88년의 생애를 마감한 것은 1989년 1월 7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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