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부임

“역대 대통령들을 FBI 요원처럼 부렸다”

에드거 후버(1895~ 1972)는 살아생전 불가침의 성역이었다. FBI 국장으로 48년 동안 보필한 8명의 대통령 누구도 그를 통제하지 못해 “역대 대통령들을 FBI 요원처럼 부렸다”는 농담의 주인공으로 회자될 만큼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후버는 대학 시절부터 “강한 자만이 살아남으며 약한 자는 멸망하고 적자들만 생존한다”는 글귀를 즐겨 인용하며 ‘강한 것’을 신봉했다. 그에게 강하다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었고, 지식이란 교과서적 지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덜미를 잡고도 남을 만한 강력한 정보를 의미했다.

후버를 48년 동안 지탱해준 무기는 비밀 파일이었다. 워싱턴 정가에서 후버의 비밀 파일은 전설이었고 후버를 지켜주는 보호막이자 힘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저명 인사들의 약점과 배경을 낱낱이 꿰고 있는 후버의 막강한 정보 수집 능력을 잘 알고 있어 감히 어떻게 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후버는 대통령의 비리는 물론 대통령 선대의 부정과 부패, 부인의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정보력을 무기로 때로는 신화를 만들고 때로는 깨며 성역을 구축했다.

후버는 워싱턴에서 태어나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주경야독하며 야간대학에 다녔다. 조지 워싱턴대에서 법학석사를 취득하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1919년 FBI의 전신인 법무부 수사국에 들어갔다. 그가 1924년 5월 수사국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미국의 사정은 혼란스러웠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선전 선동과 폭력이 난무하고, 각종 파괴활동이 횡행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사주에 의한 태업 등으로 공포와 불안도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사국은 폭력과 부정과 음모에 대항할 힘이 없었고 내부적으로는 정실주의와 패거리 문화에 휘둘렸다.

수사국장이 된 후버의 첫 표적은 갱단과 강도들이었다. 갱단은 금주법의 허점을 이용해 한창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보니와 클라이드 부부 강도나 존 델린저 같은 탈옥수 강도로 대표되는 무장 강도들은 1930년대 대공황기를 틈타 활개를 쳤다. 후버가 벌인 ‘범죄와의 전쟁’으로 주요 갱단 두목들은 체포되었고 조무래기 강도들은 사살되었다. 후버는 범죄와 싸우는 영웅의 대명사가 되었다. 반면 후버 자신은 불우한 가족사에 정서 불안, 평생 독신에 동성애 편력이 있는 그늘진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후버의 비밀 파일은 전설이었고 후버를 지켜주는 보호막이자 힘

후버의 입지가 확고해진 것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였다. 루스벨트는 1935년 수사국을 FBI(미 연방수사국)로 확대 개편하고 후버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후버가 일반 시민을 상대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도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2차대전 발발 전이었다. 독일에서 나치가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고 미국에서도 나치를 추종하는 극우파들이 세력을 키울 조짐을 보이자 루스벨트가 후버에게 정보 수집을 지시한 것이다. 2차대전 발발 후에는 FBI가 미국 내의 모든 정보 활동을 총괄했다.

FBI는 위험 인물로 간주되는 외국인들을 검거하고, 루스벨트의 묵인 아래 도청과 침입 등의 불법행위를 자행했다. 루스벨트의 정적에 대해서도 안보를 이유로 정보를 수집해 비밀 파일을 만들었다. 이렇게 작성된 FBI의 보고서는 루스벨트에게 수시로 전달되었다. 루스벨트는 백악관 주변의 정보 업무까지 후버에게 맡겨 자신의 아성을 굳건히 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종국에는 후버의 비밀 파일이 루스벨트를 겨냥하면서 루스벨트는 자신이 키운 개에게 물린 꼴이 되고 말았다.

후버의 입지는 1950년대의 냉전기를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다.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게 공산주의자 명단을 제공해 ‘매카시 선풍’의 단초를 제공하고 루스벨트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찰리 채플린, 마틴 루터 킹의 뒤를 집요하게 캤다. 캐서린 헵번, 험프리 보가트 등 할리우드의 스타들은 물론 작가 펄 벅,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도 감시했다.

후버는 아인슈타인도 공산주의자라고 간주해 22년 동안이나 전화 도청과 우편물 검열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쓰레기통까지 뒤졌다. 엘리너 루스벨트까지 공산주의자들과 연관이 있다며 감시하고 조사를 벌이자 엘리너는 “FBI가 독일 나치의 첩보 기관인 게슈타포와 다른 게 뭐냐”고 반발했다. 마틴 루터 킹도 후버의 도청에 약점이 잡혀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사후 해임이었으니 후버 자신이 임명권자였던 셈

후버는 자신의 활동을 과장하거나 포장하는 데 탁월했다. 후버의 표적이 되면 시시껄렁한 깡패라도 무시무시한 범죄자로 둔갑했다. 후버는 어떤 시기에 어떤 범죄자를 체포해야 국민이 환호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후버가 국가를 대신해 적색분자, 깡패, 나치 동조자, 체제 파괴자를 단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불의에 대항하는 미국 공권력의 상징으로 여겼으며 후버가 없었다면 국가 안보는 엉망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기자들도 후버의 영웅담을 열심히 전해주었고 의회 역시 후버가 신청한 예산이라면 그대로 통과시켜 후버의 아성을 강화해주었다.

후버는 FBI 조직 내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중요 사건이 터지면 후버 자신이 이틀이고 사흘이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일에 매달리는 데다 수시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비밀 요원들에게 가정과 부인의 안부를 묻는 다정다감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엄한 규율과 후한 대우도 요원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대통령들은 후버가 제공하는 정보에 길들여지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후버를 제거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누구도 토사구팽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후버를 가장 껄끄러워한 인물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여자 문제에 대해 거의 무방비 상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유분방했던 케네디는 후버에게 약점이 잡혀 사실상 ‘을’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케네디 형제는 나란히 대통령과 법무장관을 지낼 만큼 위세가 당당했지만 후버 앞에서는 한낱 허세에 불과했다.

린던 존슨 대통령도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후버를 어쩌지 못했다. 1964년이 후버의 의무 은퇴 연령인 70세였는데도 FBI 국장 자리를 계속 유지하도록 임기를 연장해주었다. 닉슨 대통령 역시 후버를 두려워했으나 어느덧 국민이 이미 노쇠한 후버의 퇴진을 바라고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971년의 갤럽 조사에서 국민의 51%가 후버의 은퇴를 희망하고 41%가 반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노쇠한 후버의 은퇴를 원한 것이지 후버 개인에 대한 불신은 아니었다. 후버의 업적을 평가하라는 설문에는 81%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FBI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90%가 지지한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이 뜨거운 감자를 놓고 고민에 빠졌으나 다행히 후버가 1972년 5월 2일 77세로 눈을 감아주어 고민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사후 해임이었으니 후버 자신이 임명권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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