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으로

영화 <미드웨이>는 태평양전쟁의 향배를 한순간에 바꾼 ‘미드웨이 전투’를 다룬 영화… 일본으로서는 16세기 말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 이후 최초로 대패

↑ 영화 <미드웨이> 한 장면

 

by 김지지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2년 6월 5일부터 3일 동안 하와이 북서쪽 미드웨이 앞바다에서 있었던 미·일 양군 사이의 해전이다. 이 전쟁을 다룬 영화 ‘미드웨이’가 지난 12월 31일 국내에서 개봉되었다.

미드웨이 지도

 

日, 미드웨이 해전을 태평양 전체 싸움의 승부처로 간주

일본은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에 성공하고 이후 5개월 만에 괌, 홍콩, 필리핀,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싱가포르, 버마 등은 물론 서태평양의 주요 섬까지 점령함으로써 북태평양 쿠릴열도에서 중부 태평양을 거쳐 버마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제1단계 작전을 완료했다.

일본의 최고사령부가 다음 작전을 구상하고 있을 때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시간을 끌수록 미국이 우세해지므로 하와이 북서쪽 1,600㎞ 지점에 위치한, 일본 본토와 하와이 중간에 있는 미드웨이를 공략해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에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고사령부는 야마모토의 작전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으나 1942년 4월 18일 미국의 ‘둘리틀 폭격대’가 일본의 본토를 기습적으로 공격한 것에 놀라 미드웨이 침공을 승인했다.

체스터 니미츠 미군 제독과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 연합사령관

 

야마모토는 미드웨이 해전을 태평양 전체 싸움의 승부처로 간주했다.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1942년 7월 무패의 항공모함들을 호주에서 동쪽으로 1600㎞, 뉴질랜드에서 북동쪽으로 1,700㎞ 정도 떨어져 있는 뉴칼레도니아와 피지로 보내고 8월에는 호주 남부의 연합군 기지들을 폭격한 뒤 하와이까지 점령한다는 작전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따라서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의 승리를 굳히기 위한 운명의 일전이었으며 태평양전쟁의 향배를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 중차대한 대결전이었다.

4척의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하는 일본의 제1기동함대와 야마모토가 이끄는 연합함대 주력이 미드웨이 섬을 향해 출발한 것은 1942년 5월 말이었다. 연합함대는 구축함, 순양함, 수송선 등 수십 척으로 구성되었다. 그때까지의 일본 해전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최강이었다.

미군은 일본의 암호를 이미 해독한 상태여서 일본군이 미드웨이 섬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고도 일본만큼 대규모 함단을 동원하지는 못했다. 미국의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황급히 전함들을 끌어모았으나 항공모함 3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5척 등에 불과했다. 이 가운데 항공모함 요크타운호는 5월 8일 산호해 전투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어 하와이 진주만에서 막 보수작업을 마친 뒤였다. 미국의 항공모함에 탑재된 비행기 편대 역시 속도와 기동성, 탑재 무기에서 일본에 비해 뒤졌다.

진주만에서 수리중이던 요크타운호

 

미군, 일본 함대의 위치, 방향, 일정, 목표 파악하고 기다려

이런 일본군에 맞서야 하는 미군이 단 하나 우위를 보인 것은 레이더와 통신 체계였다. 미드웨이 해전 후 미군의 자유로운 사고, 자율적 판단, 개인주의 등이 천황 숭배만을 고집하는 일본의 군사문화보다 전쟁에 유리한 것으로 분석되었지만 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미국 문화가 일본 문화보다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드웨이 작전 지역에 도달한 일본군이 1차 공격부대를 발진시켜 미드웨이 섬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6월 5일 오전 4시 30분이었다. 당시 미 태평양함대 최고사령부는 이미 암호를 해독해놓은 터라 일본 함대가 미드웨이에 도착하기 전부터 함대의 위치와 방향, 일정, 목표를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첫 출격은 미드웨이 섬의 미군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미군이 일본의 작전 상황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있는 것과 달리 4척의 항공모함을 지휘하는 일본의 제1기동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은 미군의 항공모함이 미드웨이 섬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구모는 미드웨이 섬에 두 번째 타격을 주기 위해 같은날 오전 7시쯤 항공모함에 대기 중인 뇌격기에 미드웨이 섬 공격용 폭탄을 장착하라고 명령했다. 그 사이 미 함대는 일본군 항모를 겨냥해 오전 8시 100여 기의 급강하 폭격기를 발진시켰다. 뒤늦게 미 항공모함의 접근 사실을 알게 된 나구모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한 것은 바로 그 시간이었다.

1차 출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편대를 위해 항모 갑판을 비워야 하므로 그 전에 항모에 대기 중인 뇌격기들에 출격 명령을 내려야 하는데도 뇌격기에 장착되어 있는 지상공격용 폭탄으로는 미 항공모함에 타격을 줄 수 없다고 판단해 1차 공격부대를 먼저 항모에 착함시키고 2차 출격용 뇌격기는 어뢰·대함공격용 폭탄으로 무장을 교체한 뒤 출격하라고 결정한 것이다. 결국 항공모함 갑판과 그 아래에는 급유와 재무장을 위해 온갖 항공기들이 빼곡히 들어차고 휘발유통, 폭발물, 탄약 등으로 가득했다.

 

니미츠 제독, “정보전의 승리였다”

일본의 뇌격기들이 항모에서 발진을 준비하고 있던 10시 22분쯤, 인근에 있는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호와 요크타운호에서 발진해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미군 폭격기 편대가 갑자기 급강하하며 일본 항모에 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폭탄 투하로 갑판에 줄지어 있던 일본 뇌격기와 전투기들은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탄약과 연료는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일본 항공모함 ‘히류(飛龍)호’가 미 폭격기 B-17E에서 투하한 폭탄을 피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일본군의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태평양전쟁 개전 후 연전연승을 자랑하던 항모 아카기호(3만 4,000톤 급), 가가호(3만 3,000톤 급), 소류호(1만 8,000톤 급)는 6분 만에 불길에 휩싸여 대파되거나 두 동강 나고, 미 항모 요크타운호를 침몰 직전까지 몰아가며 끝까지 버티던 마지막 항공모함 히류호(2만톤 급)도 오후 4시경 태평양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모 4척, 순양함 1척, 항공기 330여 기가 파괴되었다. 3,500여 명의 베테랑 비행 요원과 해군 요원도 바닷속에 수장되었다. 미군 피해는 일본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항모 요크타운호와 구축함, 그리고 항공기 140여 기와 300여 명의 군인뿐이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해군 전력에서 열세이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일본과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서고 태평양전쟁의 최종 승리를 예감했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정보전의 승리였다”며 “일본으로서는 16세기 말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배 이후 최초의 대패로 끝났다”고 말했다. 니미츠의 지적대로 미드웨이 해전은 미국이 일본의 암호를 정확하게 읽은 데서 이미 판가름 나 있었다. 이처럼 미군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공격을 기다렸으니 승패는 불을 보듯 뻔했다. 적의 병력과 공격 위치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군대가 결전에 나서는 경우는 역사상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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