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카를 마르크스의 결혼…가족의 슬픔과 아픔

카를 마르크스와 네 살 연상의 예니 폰 베스트팔렌은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내온 사이다. 두 사람의 아버지가 친구였던 데다 귀족(남작)이었던 예니의 아버지가 총명한 마르크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작이 마르크스를 사위로까지 생각하지는 않아 두 사람은 둘만의 약혼을 하고서 7년을 기다려야 했다. 예니는 누가보아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한 미인이었다. 언젠가 그녀를 보았던 시인 하이네는 “참으로 매력적인 여자”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7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는 세계 서간 문학사상 빼놓을 수 없는 열정적인 명문들로 평가받고 있다. 두 사람은 1842년 예니 아버지가 죽자 1843년 6월 19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 마르크스는 부드러운 성격의 빼어난 미인에게 정열적으로 고백했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진실로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 해 말 부부는 파리로 이주해 잠깐 동안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이때를 마지막으로 평생 쪼들리는 삶을 살았다. 추방과 가난 그리고 잇따른 아이들의 죽음으로 예니는 죽는 날까지 슬픔과 아픔을 겪어야 했다. 파리에서 브뤼셀로, 다시 런던으로 추방당하는 남편을 따라 주거지를 옮겨야 했고, 그 때마다 끈질기게 달려드는 가난에 몸서리쳤다. 한때는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느니 나와 아이들은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낳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마르크스는 탁월한 지성과 특별한 개성의 소유자였으나 낭비벽이 심하고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평생 부모와 처갓집의 신세를 졌으며 엥겔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늘 고리대금업자의 빚에 쪼들리다 보니 그의 ‘자본론’은 이들에 대한 증오들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남편에 대한 예니의 자부심까지 흔들리지는 않았다. 남편이 글로 싸우고 신문검열에 저항하는 동안 가정을 꾸리는 한편 비서 겸 동지로 활동했다. 예니는 자신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현장 한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남편의 일을 이해하고 인정했으며 함께 일을 나누기도 했다. 남편이 생활비를 대지않는다고 해서 남편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예니를 사랑으로 감싸고 보듬었다. 마르크스는 지저분한게 흠이었지만 유머감각이 뛰어나 부부의 웃음소리가 창밖으로 흘러나올 때도 있었다.

부부는 6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두 명이 죽고 아들 한 명은 8살에 죽었다. 성년이 된 세 딸 중 큰 딸은 마르크스가 죽기 몇 주일 전에 세상을 떠났고, 딸 하나는 남편과 동반자살했으며 막내 딸은 아편 과다복용으로 죽어 자식들의 삶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인류 역사이래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아버지를 둔 업보였다.

마르크스는 예니의 어머니가 고생하는 딸을 위해 보내준 가정부와의 사이에도 아들이 있었으나 죽는 날까지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우연히 딱 한 번만 만났다. 결국 가정부는 아이를 다른 집에 맡겨야 했고,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마르크스를 향한 예니의 사랑이 식기 시작한 것도 대략 그 무렵부터라고 한다. 아들의 존재는 1895년 엥겔스가 죽기 전 사실을 밝혀 세상에 알려졌다. 1881년 예니가 죽었을 때 엥겔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마르크스의 삶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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