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동일방직 똥물 사건

1970년대. 누구랄 것도 없이 못먹고 못살던 시대였지만 다행히 경제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주된 공로가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에 있든, 기업가의 기업가정신이나 탐욕에 있든, 노동자의 희생에 있든 분명한 것은 국가가 한걸음 한걸음 가난에서 벗어나고 있고, 노동자의 눈물과 피와 땀이 그 시대 고도성장의 밑바탕이 됐다는 사실이다. 특히 섬유와 전자산업에 투입된 어린 여공들의 희생이야말로 ‘한강의 기적’을 있게 한 원천이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했으나 당시는 어디를 간들 마찬가지였고, 병든 아버지나 남동생의 학비를 위해서는 입술을 깨물며 참아야 했다. 번번히 깨졌지만 견딜 수 없을 때는 맨몸으로 싸웠다. 도시산업선교회나 가톨릭청년노동자회는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인천 동일방직 투쟁은 그 정점이었다.

1972년 5월 10일 한국 노동운동사상 최초로 여성 노조위원장이 탄생하면서 동일방직에는 거센 회오리가 몰아쳤다. 노동계에는 대단한 화제를 뿌렸지만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고통이 따랐다. 노조는 그들에게 가해진 수년 동안의 협박, 폭행, 사표강요 등의 일상적 탄압은 견뎌냈지만, 결국에는 세계노동운동사상 유례없는 끔찍한 일을 경험해야 했다. 1976년 7월 25일, 농성 중인 자신들을 향해 경찰이 달려들었을 때 그들은 수치심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옷을 벗었다. “설마 옷을 벗은 여자 몸에 손을 대겠느냐”는 최후의 저항수단이었지만 경찰은 짐승처럼 끌고갔다. 탄압과 저항은 강도를 더해 갔다.

1978년 2월 21일 새벽 5시 50분쯤, 야근조가 힘든 철야작업을 마치고 노조위원장 선거를 위해 노조 사무실로 몰려들고 있을 때, 갑자기 5~6명의 남자 사원이 들이닥치더니 뭔가를 마구 뿌려댔다. 악취 진동하는 똥이었다. 반항하면 머리에 똥을 뒤집어씌우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투쟁은 회사 밖으로 이어졌다. 3월 10일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된 노동절 행사 때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그들의 외침에 생방송이 세 차례나 중단되었다. 명동성당으로 몰려간 조합원은 단식농성으로 저항했다. 결국 4월 1일, 124명의 조합원이 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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