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독립운동 사상 최대 승전으로 기록된 ‘청산리 대첩’ 시작

만주·간도 지방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봉오동 전투에서까지 패하자 일제는 함경도 나남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제19사단과 시베리아에 참전했던 1개 사단을 동원,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일본군이 출병한다는 정보를 전해들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9월 17일 근거지를 빠져나와 백두산 방면으로 이동했다.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했으나 이미 19사단이 두만강을 넘고 시베리아 사단이 남하하며 포위망을 좁혀오자 김좌진은 이동을 포기하고 백두산 동북쪽 60여㎞ 지점에 있는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 포위망을 쳤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9시,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올라오는 일본군 추격대를 향해 600여 명의 북로군정서군이 30분간 총탄세례를 퍼부어대 200여 명을 그 자리에 쓰러뜨렸다. 김좌진 부대가 다시 밤새 이동한 곳은 백운평에서 120리 떨어진 천수평이었다. 그사이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이도구 완루구에서 일본군 400여 명을 전멸시켰다. 10월 22일 새벽 백운평에서 또다시 일본군 기병 27연대 소속 1개 중대를 섬멸한 김좌진 부대는 일본군 중대장이 소지하고 있는 문서를 통해 일본군 사단사령부가 어랑촌에 있음을 확인한 뒤 홍범도 부대와 함께 어랑촌의 유리한 고지에 진용을 폈다.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최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한 어랑촌 전투는 10월 22일 아침부터 하루종일 계속됐다. 독립군은 북로군정서군 600여 명과 대한독립군 1500여 명으로 총력전을 펼쳤고 일본군도 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해가질 때까지 계속된 이 전투로 일본군은 1000여 명(이범석)~1200여 명(박은식)이나 사살됐다. 청산리 대첩 중 가장 큰 전과였다. 10월 26일 홍범도 부대가 고동하 골짜기 전투에서 마지막 승리를 장식함으로써 6일간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3000여 명의 일본군을 쓰러뜨린 ‘청산리 대첩’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찬연히 기록된 최대 승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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