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미국 금문교 개통

1848년 1월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서 대량의 금이 발견되고 이듬해 노다지가 터지면서 이른바 골드러시가 본격화됐다. 캘리포니아는 인구가 급증했다. 1850년 9월 미국의 31번째 주로 승격되었다. 골드러시 덕에 캘리포니아의 별명은 ‘골든 게이트 스테이트’ 즉 금문주(金門州)가 되고 샌프란시스코만(灣) 입구의 해협 이름은 금문해협으로 불리었다. 금문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안의 샌프란시스코와 북안의 마린 반도를 잇는 다리가 ‘골든 게이트 브리지(Golden Gate Bridge)’ 즉 금문교(金門橋)이다.

금문교가 공사를 시작한 것은 1933년 1월 5일. 억수같은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샌프란시스코만의 거센 물결 탓에 뱃길조차 어려워 육로로 길게 우회하며 오가던 두 지역의 주민들의 교통난 해소를 위한 것이었지만 당시 미국을 휩쓸고 있는 대공황을 이겨내기 위한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일환이었다.

공사는 조셉 스트라우스라는 걸출한 설계자와 그의 조수 찰스 엘리스가 없었다면 훨씬 늦춰졌을지 모른다. 스트라우스는 만 양쪽에 주탑 2개를 세우고 탑 위로 메인 케이블을 빨랫줄처럼 걸쳤다.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2만 7572개의 철선을 꼬아 지름이 1m가 넘는 케이블을 만들었다. 주탑 간 거리 1280m, 다리 총길이 2737m, 폭 27.4m(6차선), 높이 227m의 금문교 구상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스트라우스는 강행했다. 구름다리의 일종인 현수교는 두 개의 주탑 사이에 케이블을 설치하고 상판을 달아매는 구조다. 수심이 깊은 곳에 주로 세우며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공학적 난도가 높다. 주탑 간의 거리는 건설 기술 수준의 잣대로 간주되기도 한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소금기 낀 안개와 바닷바람, 특히 심한 파도가 공사를 방해했다. 한 차례의 지진까지 겪었다. 완공이 가까워오던 1937년 2월에는 공사장 인부들을 케이블로 연결한 안전벨트가 끊겨 10명이 한꺼번에 수장되는 비극도 감수해야했다. 1937년 4월 마침내 공사가 끝나고 5월 27일 20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거행했다. 이튿날 루스벨트는 워싱턴에서 자동차들의 운행을 시작하는 버튼을 눌렀다. 개통 후 당당한 외관과 특유의 주홍색으로 인기가 높았다. 금문교는 개통과 함께 당시 교량에 대한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미국 토목공학회는 금문교를 가리켜 ‘세계 7대 불가사의’라며 격찬했다. 1964년 뉴욕의 베라자노 내로우스 브리지(주탑 사이 길이 1298m)가 세워질 때까지 금문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다.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로 묵묵히 사람과 차량의 통행만을 도와주고 싶은 금문교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시도때도 없는 자살자였다. 자살1호는 1차대전의 전투충격으로 정신치료를 받고 있던 참전용사였다. 100번째(1948년) 500번째(1973년)에 이어 급기야 1995년에 자살자수 1000명을 기록하자 이때부터 공식적으로는 자살자를 집계하지 않고 있다. 500번째 자살 기록을 얻고자 14명이 투신했으나 공교롭게도 한 명도 죽지 않아 자살의 영예(?)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슬픈 해프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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