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스탈린 러시아공산당 서기장 취임

1922년 4월 3일, 스탈린이 러시아공산당 초대 서기장에 취임했다. 스탈린에게는 권력장악을 위한 교두보였지만, 서기장이란 직책이 전날 열린 공산당대회에서 막 신설된 직책이다보니 스탈린의 앞날을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래 정치국에 배속돼 있다가 업무가 많아지면서 독립한 서기국의 장은 이 때만 해도 여러 직책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기장에 오른 스탈린은 레닌의 병이 악화된 틈을 타 서기장의 위상을 높이며 권력기반을 급속히 강화해 나갔다.

스탈린은 러시아혁명 전 시베리아에서 4년간 유배생활을 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혁명가였다. 마르크스 이론에 밝은 것도, 그렇다고 조직 활동이나 연설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갈등할 때 레닌의 볼셰비키를 따른 것은 스탈린에게는 두고두고 행운이었다. 레닌이 그에게 관심을 보일수록 스탈린은 철저한 충성을 보이며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서기장에 취임할 수 있었던 것도 레닌의 추천 덕분이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은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3두 체제를 결성, 최대 정적 트로츠키를 제거했다. 스탈린의 포악한 성격을 문제삼은 레닌의 유서가 뒤늦게 알려졌지만 이미 권력은 레닌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이어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의 축출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음모와 모략으로 반대파를 제거한 1929년, 스탈린은 소련의 절대권력자로 올라섰다. 그러나 무리한 농민집단화 정책으로 최소한 1400만 명이 희생됐다. 강제로 징수한 곡물을 토대로 급속한 공업화에 성공하자 곧이어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자신을 무식하다고 깔본 지식분자들에 대한 보복이었다. 1936~1939년 간 139명의 당 중앙위원 가운데 98명이 총살되고 1966명의 대의원 중 1108명이 체포됐다. 비밀경찰에 의한 테러정치는 또 수백 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는 오직 권력만을 사랑했고 거기서 모든 기쁨을 맛보았기에 어떤 형태의 쾌락이나 오락도 거부했다. 식사도 옷차림도 검소한 생활로 시종했고 여자와 축재와도 거리가 멀었다. 스포츠도 음악도 미술도 모른 채 그는 오직 권력강화 만을 위해 무자비한 철권통치로 일관했다. 집권 24년동안 그의 편집광적인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무자비한 정적제거와 국민탄압으로 소련은 그야말로 동토(凍土)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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