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독일의 대문호 괴테 사망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과 정열을 남김없이 써버리고 후회없이 살다간 근대 유럽 최고의 지성인이었고 예술가였다. 그를 정의한다는 것은 그를 속박할 뿐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신적인 예지까지 터득했다는 평가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하이네는 그를 가리켜 “머리끝에서 발바닥까지 천재”라고 예찬했고, T.S. 엘리엇은 “시인이라기보다 현인”이라고 경외했다.

시인·화가·무대연출가·정치가·과학자 등 괴테의 관심분야는 다양하다 못해 실로 초인적이다. 문학사에 우뚝선 존재였음은 물론 2700여 점의 그림을 남긴 화가였고 26년 간 바이마르 궁정극장을 이끌며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280번이나 공연한 무대연출가였으며 바이마르 총리에까지 오른 정치가였다. 자연을 인간과 예술의 연원으로 간파한 그의 관심은 식물학·기상학·해부학·지질학·색채학 등으로까지 폭넓게 발전했다. 동물에게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간악골(間顎骨)을 찾아낸 것도 괴테였다.

괴테는 평생을 사랑과 실연 사이에서 갈등했던 영원한 낭만주의자였다. 뭇 여성들과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이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여든셋 괴테의 삶은 그가 왜 대문호의 반열에 올라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첫 사랑 프레데리케와의 이별은 시 ‘제젠하임의 노래’를 부르게 하고, 친구의 약혼녀인 샬로테(로테)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탄생시켰다.

약혼까지 했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 릴리 쇠네만, 궁정에서 만나 1500통 이상의 연서(戀書)를 보냈던 유부녀 샬로테 폰 슈타인 등 그의 삶을 거쳐간 수많은 연인들은 언제나 마르지 않는 창조의 원천이었다. 30여 년간을 함께 살았던 본부인 크리스티아네가 숨지자 괴테는 71세 나이로 16세의 울리케 폰 레베초를 만나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지폈다.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나는 요즘 춤추듯 살고있다”며 사랑찬가에 열을 올렸다. 이때도 괴테는 그녀에 대한 절절함을 담은 시 ‘마리엔바트 비가(悲歌)’를 남겼다. 1832년 3월 22일, 바이마르에서 숨져 살아생전 진한 우정을 나눴던 실러 옆에 묻혔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