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환경운동 수준을 10년 앞당긴 사상 최대 환경사고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방류한 1.3t의 페놀 원액이 낙동강의 지천으로 흘러들어간 것은 1991년 3월 14일 저녁 10시쯤이었다. 이것이 대구시 식수의 70%를 공급하는 다사수원지로 유입되어 정수처리제인 염소와 결합, 클로로페놀로 변한 것은 3월 16일 오후 2시쯤이었다. 페놀은 인쇄회로기판(PCB)을 만드는 수지나 농약 제조의 원료로 사용하는 독성 물질로 2차대전 때는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클로로페놀은 농도가 1ppm을 넘으면 암이나 중추신경장애 등 신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극약과도 같은 물질이다.
3월 16일 저녁 대구시 일부 가정의 수돗물에서 악취가 났다. 시민들의 항의가 잇따랐으나 다사수원지는 원인도 모른 채 더 많은 염소를 투여해 악취를 더욱 가중했다. 악취 소동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가깝게는 2주일, 멀게는 2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대구시 상수도본부는 “상수도 물의 세균 오염을 막기 위해 염소 소독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라며 별일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번의 악취는 전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는지 뒤늦게 사태 파악에 나서는 한편 이산화염소로 소독약품을 대체하는 등 긴급 대책을 마련했다. 경찰도 조사에 나서 일부 공장에서 공장 폐수를 낙동강에 쏟아버린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두산전자 구미공장은 5개월 동안 300여t가량을 방류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식수에 대한 페놀 함유 허용치는 0.005ppm이었는데 낙동강 하천에서 검출된 일부 지역의 페놀 함유량(0.11ppm)은 이 허용치의 22배, 세계보건기구 허용치의 110배나 되었다.
페놀이 강물에 실려 하류로 내려가자 부산․마산․창원까지 악취에 시달리고 낙동강에 물을 의지하는 모든 지역이 페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른바 ‘페놀 대란’이었다. 일부 목욕탕은 휴업을 하고 페놀 수돗물로 만든 두부 등 음식들은 폐기 처분되었다. 약수터는 북새통을 이루고 생수는 품귀 현상을 빚었다. 당시 내국인 판매가 불법이던 생수는 이 사건 5개월 후 합법화되었다.
시민들의 항의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경실련․공추련 등 10여 개의 환경․사회운동 단체는 두산 제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정부는 두산전자 구미공장장 등 6명을 구속하고 1개월 간의 조업정지 처분을 내려 여론을 잠재우려 했다. 그런데도 수출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유로 보름 만에 조업 재개를 허용했다. 그러나 조업 재개 5일 만인 4월 22일 두산전자가 또다시 2t이나 되는 페놀을 방류함으로써 또다시 전 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실이 알려져 결국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이 물러나고 환경처 장․차관이 한꺼번에 경질되었다.
1985년의 ‘온산병’에 이어 또다시 영구 미제로 남아
페놀 쇼크는 2개월 정도 지나 잦아들었다. 하지만 페놀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대구의 임산부들은 그냥 있을 수 없었다. 페놀 사건이 터진 후 4월 말까지 접수된 1만 3000여 건의 피해 신고 중 임산부의 신청 건수는 844건이었다. 그해 11월 대구시 환경분쟁조정위원회는 988건에 대해 2억 8122만 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페놀피해분쟁 조정을 내리는 한편 1000여 건은 중앙조정위에 이송했다.
조정위는 조정신청을 한 844명의 임산부 중 유산 또는 사산 임산부 271명에게는 연령과 초산 여부에 따라 50만~100만 원, 일반 임산부 573명에게는 20만 원씩 모두 2억 6000만 원을 지급하도록 했다. 그러나 60여 명의 임산부들은 조정안에 불복, 중앙환경분쟁조정위에 재심을 신청했다. 중앙조정위의 조정안도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자 16명의 임산부는 1992년 10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2년여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으나 대구지법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1995년 2월 ‘조정’으로 종결지었다. 사건 당시 수돗물의 페놀 및 클로로페놀의 농도를 정확히 알 수 없고 이것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조정 이유였다. 이로써 페놀 방류 사건은 1985년의 ‘온산병’에 이어 또다시 영구 미제로 남게 되었다.
페놀 방류 사건은 환경운동가들이 ‘우리나라 최대 환경오염 사건’으로 꼽을 만큼 충격파가 컸다. 우선 환경오염이 식수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큰 사회적 경고와 함께 전국적인 환경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기업 이윤의 극대화는 절대선이고 그 선을 위해선 식수원인 강물에 ‘독약’을 흘려도 눈감아주던 성장 일변도의 사고방식에 제동이 걸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양적인 팽창뿐 아니라 질적인 변화까지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페놀 사건은 ‘환경운동의 수준을 10년 앞당긴 사상 최대의 환경 사고’로 평가되고 있다. 소수에 불과하던 환경단체들도 페놀 사건 이후 2년 만에 100여 개를 넘어섰다. 사건은 두산그룹에도 재앙이었다. 그룹 회장 사임, 두산전자 사장 해임, 공장장 등 6명 구속, 여기에 220억 원의 손해배상과 땅에 떨어진 기업 이미지는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